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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214. 일상의 추모, 슈톨퍼슈타이네

유럽은 어디를 가던 기념비가 많이 보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독일은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기념비 또는 추모비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정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현판은 물론이고, 특정 사건을 기념하거나 특정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다양한 형식의 메모리얼도 여기저기 아주 많죠.


그래서 독일을 여행하다보면 거리나 광장에 의미심장한 조형물을 심심치 않게 만나는데, 그들의 역사를 잘 모르는 우리로서는 이게 뭔지 알 길이 없으니 그냥 지나치게 되는데, 이것만큼은 그 의미를 알고 여행하자는 의도로 가장 빈번히 만날 수 있는 기념비의 의미를 하나 소개합니다.

길거리를 걷다보면 보도블럭에 이런 금색 현판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곳에는 1개, 어떤 곳에는 2~3개, 어떤 곳에는 족히 10개 이상의 동판이 바닥에 박혀 있고, 사람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눈치를 굴리면 이런 유추가 가능하죠. 이 사람이 어떤 유명한 사람인데 여기 살았었다고 기념하는 것이겠구나, 라고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여기 살았던 사람을 기록한 건 맞는데, 유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끌려 간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바닥에 이런 동판이 보이면, 그 앞 건물에 살던 이 피해자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의미가 되는 거죠.

이해를 돕기 위해 확대해보았습니다. 왼쪽 동판의 글귀를 보면,


HIER WOHNTE (여기에 살았다)

ALBERT VON HALLE (알베르트 폰 할레)

JG. 1876 (Jahres Geburtstag) (1876년생)

DEPORTIERT 1941 (1941년 추방)

RIGA (리가)

ERMORDET (사망)


여기에 1876년생 알베르트 폰 할레씨가 살았는데, 1941년 리가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어 사망했다고 합니다. 알베르트 폰 할레씨가 엄청난 업적을 남긴 위인이 아닙니다. 그냥 옆집에 사는 평범한 할아버지였을 겁니다. 굉장히 잔인한 표현이겠지만, 어느날 죽어도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을 그런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 평범한 사람의 희생까지도 이렇게 금속에 새겨 바닥에 박아 영원히 기록합니다. 이 기념비를 독일어로 슈톨퍼슈타이네(Stolpersteine). 직역하면 "걸림돌(들)"이라는 뜻입니다. 걸어가다가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걸림돌이라고 한 이유. 걸어가다가 잠깐이라도 멈추고 보라는 의미겠지요.


우리는 독립운동가의 이름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일제강점기 중 무고하게 생을 마감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의 이름은 아예 알 수 없습니다. 독일은 내 집 앞에, 내 일터 앞에, 유명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의 이름까지 이렇게 다 적어둡니다. 살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죠. 나치가 저지른 만행이 이렇게 평범한 일반인의 일상을 파괴했음을 실감할 수 있고, 만약 또 이런 광기가 되풀이되면 그 때는 나와 내 가족도 피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음을 실감할 수 있겠죠.


별 것 아닌 "걸림돌"이지만, 슈톨퍼슈타이네는 평범한 사람의 비극을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고 기발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슈톨퍼슈타이네는 국가나 정부에 의해 추진된 게 아닙니다. 1992년 베를린에 거주하는 예술가 군터 뎀니히(Gunter Demnig)가 베를린에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10x10cm 크기의 동판에 피해자의 이름을 적어 그들이 살았던 집 앞 보도블럭에 고정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반대도 있었답니다. 피해자의 이름이 발에 밟히는 거니까 그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라는 비판이 있었다네요. 그러나 오히려 여기 적힌 이름을 보려면 허리를 숙여야 하니 피해자의 이름 앞에 묵념을 하게 되는 것이라 반론하였고, 가뜩이나 추모와 기념의 행위가 일상화 된 베를린이었기에 이런 프로젝트가 성사되었습니다.


(사실 가장 첫 슈톨퍼슈타이네가 설치된 곳은 쾰른입니다. 그런데 쾰른의 "걸림돌"은 나치에게 추방당한 희생자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인 1800년대에 독일에서 추방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를 추모하는 글귀를 적은 것입니다.)


내 집 앞에,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는 피해자의 기림이 주는 파급효과는 상당했습니다. 이후 슈톨퍼슈타이네는 독일 각지로 번져나갔고, 최근에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등 유럽으로 번져나가 지금 유럽의 길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걸림돌"의 개수만 6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비를 털어 설치했는데 이제 지자체로부터 설치에 필요한 협조를 받는 수준으로 인정받는다고 하네요.


전쟁이나 독재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면 결국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우리 같은 일반인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그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그래서 더더욱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는 슈톨퍼슈타이네는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메모리얼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프로젝트가 가능하려면 전제가 필요합니다.


희생자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디에 살았으며, 언제 무슨 죄목으로 어디로 끌려갔는지, 기록이 남아있고 현장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가령, 동대문 사는 김씨가 강제징용 끌려갔다는 걸 밝혀내도 김씨가 살던 집은 진작 없어지고 초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다면 추모의 의미가 퇴색되겠죠. 수백년 된 건물을 아직도 그대로 보존하는, 전쟁으로 파괴되었어도 다시 원래대로 복원하는, 그래서 최대한 그 시대의 모습에 가깝게 유지하는 곳이니까 슈톨퍼슈타이네의 정신이 유효합니다.


독일은, 유럽은, 그게 가능합니다. 그게 부럽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