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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236. 베를린 모더니즘 주택단지

앞선 글을 통해 바우하우스 100주년 테마여행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바우하우스 철학에 따라 만들어진 모범사례를 가지고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일단 사진 하나 보고 시작하죠.

평범한 아파트촌입니다. 길게 주차된 차량들이나 1층 상가 간판에서 볼 수 있듯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데 주차된 차량이 대부분 연식 오래 된 소형차인 걸 보니 부자들이 살지는 않는 것 같은 그런 평범한 아파트입니다.


이 아파트가 언제 생겼을까요? 놀랍게도 90년 전에 만든 건물입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궁핍기를 보내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 다시 급속도로 산업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대도시에 공장이 계속 생기고,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몰려듭니다. 베를린이 그랬습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니 집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공장 노동자 일자리를 찾아 온 사람들인데 돈이 많을 리도 없죠. 서민들이 주거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면서 많은 노동자를 한꺼번에 수용할 주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해답이 이런 아파트촌입니다. 당시 베를린 곳곳에, 특히 공장이 있는 시 외곽 지역 부근에 아파트 단지가 생깁니다. 서민 주택이라고 대충 짓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살아야 하니 효율적인 설계는 필수였겠죠. 이 프로젝트에 깊히 관여한 이가 바로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입니다. 그로피우스 외의 다른 건축가들은 직접적으로 바우하우스와 연관이 없더라도 바우하우스가 물꼬를 튼 모더니즘 건축가들이었으니 결국 줄기는 같습니다.


이렇게 지어진 아파트촌을 "모더니즘 주택단지"라 부릅니다. 기존의 주거 철학을 완전히 뒤엎는 모더니즘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여기가 나오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은 게 사실입니다.


오늘날 베를린에 총 여섯 곳의 모더니즘 주택단지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여섯 곳은 기적적으로 큰 화를 입지 않았고, 동서독 분단시절 체계 없이 유지보수되면서 많이 훼손되기도 했으나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을 마친 곳들입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택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살면 건물은 훼손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대규모 주택단지가 90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고, 그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여섯 곳의 모더니즘 주택단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모더니즘 주택단지에는 누가 살까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삽니다. 집주인은 누구인가요? 부동산 임대업체입니다(독일은 대부분 전문업체가 건물을 소유하고 세입자에게 월세를 받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월세 내고 사는 그냥 평범한 아파트 같은데, 이게 무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대단하죠.


중간에 계속 유지보수되고 있기는 하지만 안전에 위험이 있다면 사람이 살 수 없죠. 처음에 제대로 만들어 90년 동안 문제가 없다는 것이 놀랍고, 90년 전에 설계한 주택인데도 현대인이 전혀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가 위대합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이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니 함부로 부술 수도 없습니다만, 그 전에 수십년 동안 "재건축"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택단지가 유지된 것도 대단합니다. 우리는 20년만 되어도 때려부수고 재건축할 생각만 하죠. 막말로 이 주택단지를 허물어버리고 20~30층까지 고층 아파트를 지었다면 집주인은 얼마나 떼돈을 벌었겠습니까. 그런데 90년이 되도록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주택을 "돈"이나 "자산"이 아닌 "거주공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즉, 우수한 설계와 시공을 남긴 "과거인"에게 박수를, 그리고 아파트를 투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현대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했죠. 그래서 찾아가도 특별히 대단한 모습은 없습니다. 평범합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위대합니다. 사람 사는 집에 들어가볼 수는 없겠지만 겉에서라도 그 위대함을 느껴보실 분들에게는 여섯 곳의 주택단지 중 지하철로 접근이 쉬운 지멘스슈타트 주택단지(Großsiedlung Siemensstadt)를 추천합니다.

독일 가전회사 지멘스(Siemens)를 들어본 분들이 많을 겁니다. 베를린에 지멘스 공장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것이 모더니즘 주택단지 조성의 원인이었다고 했죠. 지멘스 공장 주변에 노동자를 위한 거대한 아파트촌이 생긴 것이 오늘날 지멘스슈타트 주택단지입니다. 참고로, 지멘스가 워낙 크고 유서 깊은 회사이다보니 본사와 공장이 있는 주변 지역의 행정구역명이 지멘스슈타트(지멘스의 도시)입니다.


베를린에 참 다채로운 볼거리가 많은데, 무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모더니즘 주택단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남들이 흔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그러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 이야기거리를 취재하고자 아파트촌을 뒤져가며 모은 정보들이 <베를린 홀리데이>에 빼곡히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