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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117. 궁전에서 공 차던 아이들

만약 경복궁 마당에서 축구를 한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드시겠습니까? 굉장히 많은 욕을 먹지 않을까 예상합니다(몇년 동안 서울 나갈 일이 거의 없어서 요즘 분위기를 잘 모른다는 것은 미리 덧붙입니다).


독일 뮌헨을 취재할 때의 일입니다.


서울로 따지면 경복궁 같은, 옛 왕실의 궁궐이자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뮌헨의 레지덴츠 궁전입니다. 레지덴츠 궁전 앞에 호프가르텐(Hofgarten)이라는 정원이 있는데, 여기서 두 아이가 공을 차며 놀고 있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혹 실수로 공을 잘못 차서 문화유산의 유리창을 깨먹지는 않을까 우려되어 못하게 할 것 같은데, 독일은 그런 것 없습니다. 궁전의 앞마당을 공원으로 단장해 시민에게 개방했고, 시민이 공원에서 하고 싶은 걸 하는 건 그들의 자유니까 막을 이유가 없는 것이겠지요.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녁부터 나와 공을 차던 아이들이 신기해서 먼 발치에서 한참을 지켜봤습니다. 아이 치고 발재간도 좋고 공에 집중하면서도 계속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일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공놀이"에 빠져드는구나, 그러니 나이가 들어서도 "공놀이"에 환장하고 열광하는구나,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독일인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은 방송에 나와서 "축구란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게 독일에서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말인지 또는 다니엘 개인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표현만큼 독일인의 축구 사랑을 함축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축구는 독일인의 일상에 늘 함께 존재하는 것, 그리고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공기 같은 존재죠.


축구는 독일인의 트라우마 극복에도 기여했습니다. 원래 독일인은 국기를 게양하거나 휴대하는 걸 꺼렸습니다. 나치 독일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국가의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된 것입니다. 전체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모든 행위를 금기시하게 됐죠. 지금도 학교에서 입학식이나 졸업식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단체가 모여서 세레모니를 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겁니다.


그런데 2006년 독일 월드컵이 열렸을 때, 자국에서 행사가 열린다는데, 그것도 공기와도 같은 축구의 큰 행사가 열린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독일을 응원하기 위해 국기를 들었고, 국기 문양의 머플러를 두르고, 얼굴에 국기 문양의 페이스 페인팅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바탕 신나게 놀면서 "여름동화"를 완성하였고, 그 때부터 국기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했습니다. 이제 독일인은 국기를 들고 다니거나 몸에 두르는 데에 거부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 축구입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적 없는 월드컵 무대입니다. 그런데 졌습니다. 탈락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지만 독일이 어떤 분위기일지 훤히 보입니다. 화를 내는 것보다 패닉에 빠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마치 자연재해나 테러를 마주한 느낌, 내 일상이 파괴되었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무력함에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한 그런 분위기일 것입니다.


오전에 독일의 유력 언론 사이트를 몇 곳 훑어봤습니다. 역시나 월드컵 조별예선 탈락과 관련된 소식이 톱을 장식하고 있고, 뢰브 감독의 사퇴를 대놓고 요구하거나, 일부 선수의 경기력을 비판하거나, 경기 후 외질이 팬과 다툼이 있었다는 소식 등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가히 그들에게는 "재난"에 다름 없는 상황입니다.

지난달 신간 취재를 위해 동유럽에 갔다가 독일에 잠시 들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월드컵을 맞이하여 축구 마케팅에 한창이더군요. 2006년이나 2010년쯤 월드컵만 되면 전국이 붉은색으로 물들고 기업마다 축구 관련 광고를 내던 그런 분위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으니, 아마 한동안 독일은 축구로 매우 시끄러울 겁니다. 누구는 사퇴하라, 누구는 사과하라, 이러면 안 된다, 여기저기서 갑론을박이 벌어질 겁니다.


흔히 독일인이 이성적이고 점잖고 합리적일 것 같죠?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축구만큼은 예외입니다. 한 번은 독일이 월드컵 지역예선을 치를 때 한 경기에서 4점을 내주는 졸전을 벌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한 경기를 가지고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고, 골키퍼 노이어에 대한 비판이 폭주하며, 어떤 신문에서는 전설적인 골키퍼 올리버 칸이 "노이어를 믿어줘야 한다"는 칼럼을 게재하는 그런 모습까지 본 적 있습니다.


(기억이 맞는지 검증하려고 찾아봤습니다. 제가 아내와 기차에서 그 신문을 봤으니까 2012년 가을인데 그 때가 2014월드컵 유럽 지역예선 기간이 맞네요. 그리고 한 경기에서 4실점해서 4:4로 비겼던 경기가 있습니다. 패배한 것도 아니라 무승부였는데도 그렇게 충격을 받은 거네요. 공교롭게도 당시 상대팀이 스웨덴입니다. 그리고 독일은 예선을 9승 1무로 통과했고 우승까지 합니다. 그 1무-4실점 때문에 여론이 출렁했는데 지금 독일인의 패닉이 어느정도일지 감이 잡히실지 모르겠습니다.)


궁전 앞에서 공 차던 뮌헨의 소년들도 눈물 펑펑 흘렸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