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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121. 맥주순수령이 위대한 이유

독일 하면 맥주가 유명하죠.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만 1000곳이 넘고, 맥주의 종류는 족히 5000종에 이릅니다. 게다가 다 맛있어요. 세계 최고로 꼽히는 독일의 맥주, 그 이유를 우리는 "맥주순수령"에서 찾습니다.


1516년 바이에른에서 공포된 맥주순수령은, 맥주를 만들 때 물, 홉, 맥아, 효모 외에 다른 것을 넣을 수 없다고 규정한 법입니다. 같은 원료만 가지고 맥주를 만들어야 하니 저마다 맛을 내려고 치열하게 연구했겠죠. 그렇게 완성된 최상의 레시피가 수백년 동안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맥주순수령에 대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장문의 글을 작성해야 하니, 우선 맥주순수령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고요.


독일의 맥주 회사나 양조장은 여전히 맥주순수령을 준수합니다. 오늘날 더 이상 맥주순수령이 법적 효력을 갖지는 않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수백년을 지켜 온 레시피를 고집하는 거에요. 수백년 전에 만들던 맥주와 지금 만드는 맥주는, 원료도 똑같고 제조법도 똑같습니다. 세상이 변해 제조공정에 변화가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 마시는 맥주가 수백년 전에 마시던 맥주와 똑같은 맛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혹자는 이야기합니다. 요즘 세상에 수백년 전의 맛을 고집하니 시대에 뒤떨어지고 다양성도 부족한 것 아니냐고요. 맥주 마니아 중에는 그런 이유로 독일 맥주를 꺼리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맛있는 건 인정하지만 다 예측 가능한 맛이라 개성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그 예측 가능한 "최상의" 맛이 좋아서 독일 맥주를 물처럼 마시는 사람이니까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관점을 바꾸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한국에도 전통 술이 있습니다. 맛있는 술이 많아요. 그런데 과거에 세종대왕께서 마셨을 술을 지금 우리가 마시지는 못하죠. 정약용 선생이 마신 술, 율곡 이이 선생이 마신 술을 우리가 마시지는 못하죠. 전통이 끊어진 겁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런 게 가능합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마시던 맥주, 대문호 괴테가 즐겨 마시던 맥주를 지금 우리도 마실 수 있습니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똑같은 레시피로 만들잖아요. 맥주순수령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맥주 한 잔에도 이렇게 시간을 초월한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 독일 맥주만이 선사할 수 있는 신세계입니다.

쾨스트리처(Köstritzer) 흑맥주입니다. 1543년부터 만들었습니다. 괴테가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마시는 쾨스트리처 흑맥주의 맛은 괴테가 마시던 맛과 똑같습니다. 500년 가까이 이어 온 전통 덕분에 괴테가 마시던 맥주를 내가 마실 수 있습니다. 이게 맥주순수령이 위대한 이유입니다.


참고로 위 사진은 독일이 아니라 헝가리 시오포크(Siofok)에서 찍었습니다. 현대의 냉장 유통 기술은 신선한 맥주를 그 맛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도 즐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맥주순수령 덕에 지켜 온 맥주의 맛을 독일인만 독점하는 게 아니라 전세계에서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선한 쾨스트리처 흑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분위기 좋은 펍입니다. 천장에 술병이 메달려 있어서 가게 이름이 Hanging glass라는 뜻의 헝가리어인 로고 위벡(Lógó Üveg)입니다. 독일과 전혀 상관없는 도시의 아담한 펍에서도 독일에서 먹는 그 맛을 만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세상에 살고 있네요.


독일을 여행한다면 맥주에 대한 관점을 단순히 술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맥주는 독일인과 수백년의 시간을 함께 한 그들의 삶의 일부이며 문화입니다. 독일에서 독일 맥주를 마시는 것을 그들의 수백년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맛까지 좋습니다. 맥주순수령이 준 이 축복을 마다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대로 끝나면 썰렁하니까 시오포크 사진 몇 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