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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227. 현대 건축의 조상, 바우하우스

먼저 어떤 학교의 외부와 내부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평범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모 반듯한 성냥갑 같은 건물, 내모 반듯한 테이블과 의자, 네모난 창문 등등. 여기서 어떠한 "특별함"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사진 속에 나오는 건축과 가구는 우리가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진입니다.

의자와 테이블의 느낌이 확연히 다릅니다. 이런 걸 고풍스럽다고 하죠. 앤티크하다고 하죠.


자, 본론을 시작합니다.


원래 과거에 건물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 때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문양이나 장식을 넣었습니다. 바로크 양식이니 르네상스 양식이니, 그런 용어는 일단 넣어둡시다. 아무튼 우리가 유럽을 여행할 때에는 이런 고풍스러운, 전통적인, 유서깊은 무언가를 보러 가죠.


네모난 성냥갑 같은 건물을 보러 가지는 않죠. 내 주변에서 흔히 보는 걸 유럽까지 가서 또 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네모 반듯한, 현대 건축의 전형적인 공식이 출발한 곳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런 공식을 창조하고 세계에 전파한 이들이라 하면 어떨까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죠. 여기가 바로 바우하우스(Bauhaus)입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Weimar)에 생긴 건축학교입니다. 아니, 편의상 그렇게 이야기는 하는데 당시에는 건축을 가르칠 여력은 없었고 공예나 설계, 디자인 분야에 특화된 학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바우하우스의 창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모든 공예의 궁극적 목표는 건축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가구를 만들거나 디자인을 하는 그 모든 과정이 결국 사람이 생활하는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한 것이니 바우하우스는 건축가를 양성하는 건축학교가 틀림없습니다.


바우하우스의 철학은 단순명료합니다. 그들은 철저히 실용성에 집중하였습니다.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고 오로지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을 연구했고, 하나의 표준을 제시하였습니다.


앞서 바우하우스의 건축이나 인테리어가 지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죠. 바로 바우하우스의 정신이 현대 건축으로 이어져 지금도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바우하우스가 이러한 철학을 가진 것에는 당시 시대상도 반영됩니다. 1918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패전국이 되었습니다. 왕정이 깨지고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살림살이가 너무 궁핍하니 재료를 최대한 아끼고 생산성을 극대화하되 기본에는 충실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일상생활의 패턴을 분석하고 연구해 불필요한 낭비를 모두 제거하고 가장 핵심만 살려 실용성을 극대화 한 건축에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굉장히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만들어 모든 학생이 단계별로 체계를 갖추어 마이스터(장인)가 되어 졸업하도록 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비록 졸업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미술, 조각, 디자인, 수공예 등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를 배출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도출합니다.

1925년, 바이마르에서 더 이상 학교를 지원하지 않음에 따라 발터 그로피우스는 데사우(Dessau)로 바우하우스를 이전합니다.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대학 건물은 그로피우스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했습니다. 즉, 바우하우스의 초기 비전이 가장 함축적으로 집약된 대표적인 장소로 꼽힙니다.


1928년, 그로피우스는 교장에서 물러나고 후계자에게 물려주었지만, 이후부터 바우하우스는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2대 교장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다른 교수진과 마찰을 빚다가 물러나고, 1930년부터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3대 교장이 됩니다. 미스의 어록인 "Less is more"는 바우하우스 철학을 함축하는 표현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바우하우스 내부적으로도 혼란한 이 시기, 독일은 더더욱 혼란했습니다. 나치당과 히틀러가 부상했죠. 나치는 진보적인 가치관을 철저히 틀어막았기에 바우하우스도 탄압을 받아 폐교에 이릅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사비를 털어 1932년 베를린(Berlin)에 폐공장을 빌려 바우하우스의 명맥을 이어가려 했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당이 되면서 이마저도 탄압을 받아 폐교에 이르게 됩니다.


바우하우스의 리더는 나치의 탄압 대상이기도 했기에 발터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독일에 살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고, 미국에서는 현대 건축의 거장이 자기 발로 찾아왔으니 극진히 환대하여 건축학교를 이끌도록 배려해 결국 바우하우스의 이상은 독일이 아닌 미국에서 만개하게 됩니다.


건축이나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면 바우하우스는 굳이 몰라도 상관없는 역사의 한 토막입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책상이나 의자,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등 현대 건축의 조상님이 바로 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조금 더 재미있는 여행 테마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발터 그로피우스는 늘 마음 속에 조국 독일을 생각했습니다. 조국 독일에서 바우하우스의 뿌리를 찾아 되살리고 기념하고 싶었지만, 바이마르와 데사우 모두 동독에 속했기 때문에 미국인이 된 그로피우스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서베를린에 바우하우스 기념관을 만들 기회를 얻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바우하우스의 전성기 철학이 집대성 된 바로 그- 데사우 학교 설계도 원본 등 귀중한 자료를 기증하여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이 완공되기 전 사망함에 따라 베를린의 바우하우스 전시관이 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도 마찬가지로 말년에 서베를린에 건축 프로젝트를 맡았습니다. 신 국립미술관이 바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 그리고 그도 이 프로젝트를 끝으로 사망하면서 이곳이 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바우하우스를 만들고 이어받아 현대 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두 사람이, 독일에서 쫓겨나 타국에서 이상을 완성하고는, 말년에 다시 독일에 마지막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스토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