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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28. 베를린과 류블랴나의 뒷골목

독일 베를린의 중심부에 슈바르첸베르크 하우스(Haus Schwarzenberg)라는 곳이 있습니다.

겉에서 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건물의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와, 변두리도 아니고 시내 한복판에 이런 다 무너져가는 폐허 같은 모습이라니요. 무서워보이기까지 하는 이 허름한 공간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공방과 갤러리를 만들고 술을 팔면서 자유롭게 창작활동하는 일종의 문화센터입니다.


베를린은 전쟁 이후 분단까지 겪으면서 버려진 땅이 많았습니다. 특히 베를린 장벽 주변은 개발하기 어려운 곳이었기에 베를린 한복판에 버려진 땅이 많았고, 무너져가는 건물을 철거하지도 못하고 다시 짓지도 못하고 그냥 방치해둔 곳이 많았죠.


"빈 집"이니까 오갈 곳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무단 점거했습니다. 건물을 예쁘게 꾸밀 이유도 없었죠. 다 무너져가는 낡은 건물에 낙서해가며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무정부주의 성향이 강하죠. 그 결과 오늘날 매우 이질적인 뒷골목의 기운이 베를린 한복판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스쾃(squat)이라고 합니다. 운동하는 분들이 '스쿼트'라고 말하는 그 단어와 같습니다. "쪼그려 앉다"는 뜻인데, 빈 건물에 숨어서 무단으로 점거해버리는 행위가 마치 쪼그려 앉는 것과 같다고 하여 무단점거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빈 땅이 많고 버려진 건물이 많았던 베를린이야말로 스쾃의 성지였죠. 전세계에서 몰려든 예술가들이 여기저기서 무단점유로 그들의 터전을 만들었습니다. 한때 유명했던 타헬레스(Tacheles)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타헬레스는 지금 더 이상 운영되지 않습니다. 폐허 같은 건물을 부수고 그 자리에 번듯한 새 건물을 만들 계획이라고 합니다.


빈 건물을 무단점거한 것이라 했는데, 그렇다는 것은 원래 건물주나 땅주인이 있다는 소리잖아요. 그들이 이제 재산권을 행사하면 가난한 예술가들은 쫓겨날 수밖에요. 슈바르첸베르크 하우스 역시 몇년 전부터 우리를 쫓아내려 한다는 호소문을 붙여놓고 있습니다.


스쾃은 그 자체로 범죄행위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술가들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내 우리 같은 여행자에게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맞습니다. 아마 앞으로 스쾃은 점점 설 자리를 잃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그 전까지 실컷 즐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를 여행하던 중에도 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뒷골목의 자유분방한 영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메텔코바 메스토(Metelkova Mesto). 역시 버려진 건물을 가난한 예술가들이 접수하여 자기들의 공방과 갤러리로 사용하고 술도 팔면서 창작 활동을 영위하는 공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쾃과 약간의 차이는 있어요. 메텔코바 메스토가 있던 자리는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주둔한 곳이었고(국가소유부지),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할 때 지역 예술가들이 시당국과 협의하여 사용 허가를 받았습니다. 공공성을 일정 부분 담당하고 대안문화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죠.


다만, 그렇다 보니 베를린처럼 날 것 그대로의 무정부주의적인 예술혼을 불태우는 건 아닙니다. 정부와의 협력이 필요한 이들이 무정부주의를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베를린이 스쾃이 매운 맛이라면, 여기는 순한 맛이라고 해야 할까요?


메텔코바 메스토는 불법행위라는 스쾃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문화공간입니다. 현재 유럽에서 이러한 경향이 몇몇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운 맛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지 몰라도 일반적인 여행자의 시선에서 보자면 재미있고 신기한 순한 맛은 될 것 같습니다.

유럽은 확실히 예술에 있어 다양성이 가득하고 특이한 모습이 곳곳에서 펼쳐집니다. 그 한 단면으로 베를린과 류블랴나의 뒷골목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