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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독일뉴스

News | 독일 축구팬이 호펜하임을 싫어하는 이유

한국인 선수도 잠깐 뛰어 국내에도 인지도가 있는 TSG 1899 호펜하임(Hoffenheim) 축구단과 독일 최고 인기구단인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 도중 팬들의 "욕설 플래카드"로 경기가 중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직역하면, "DFB(독일축구협회)는 약속을 어겼고 호프(Hopp)는 개XX(Hurensohn)이다"는 원색적인 욕설이다. 바이에른 뮌헨 팬들이 경기 후반 기습적으로 플래카드를 펼쳤고, 뮌헨 관계자까지 나서 철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기가 중단되었다. 다시 재개된 경기의 잔여시간은 양팀 선수들이 공만 돌리며 사실상 플레이를 포기한채 끝났다고 한다.


경기장에서 특정인을 혐오하는 쌍욕을 대놓고 게재한 것은 명백히 과도한 행동이 맞다. 그렇다고 해서 "훌리건" 수준으로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아무튼 부끄러운 상황인 건 맞다. 그와 별개로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욕을 먹은 대상이다.


이런 욕을 먹은 호프가 누구일까? 독일의 조만장자 디트마르 호프(Dietmar Hopp), 기업용 SW 기업인 SAP의 공동 창업자이며, 이른바 "독일의 빌 게이츠"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호펜하임 구단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뮌헨 팬들이 굳이 타팀 구단주를 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 분데스리가는 50+1룰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축구단은 반드시 시민과 비영리단체가 51% 이상의 지분을 가져야 하는 규정이다. 따라서 중동의 석유재벌이든 대기업 오너든 아무리 큰 돈을 들고 와도 구단의 소유권을 49% 이상 소유할 수 없어 가장 순수한 스포츠리그의 본질을 지킨다. 구단 운영에 큰 돈을 쓰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입장료도 저렴하여 다수의 축구팬이 즐거움을 누린다.


지금까지 여기에 예외를 받은 팀은 딱 둘 있었다. 제약회사 바이엘이 소유한 바이엘 레버쿠젠,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의 소유한 볼프스부르크. 이 두 팀은 50+1룰이 생기기 전에 이미 기업에서 창단한 팀이었기에 기업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2015년, 독일축구협회가 예외를 인정하여 호펜하임에 50+1룰을 면제하는 특혜를 주어 독일 역사상 최초로 기업도 아닌 개인이 분데스리가 축구단을 소유하게 되었다. 현재 디트마르 호프가 호펜하임 구단 지분 96%를 소유하고 있다.


호프는 10대 시절 호펜하임의 유소년팀에서 뛰었다고 한다. 그가 호펜하임에 운영자금을 후원하기 시작한 1989년, 팀은 8부리그에 있었다. 그냥 지역 아마추어팀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호프가 적극적으로 후원금액을 늘린 2000년부터 호펜하임은 계속 승격을 거듭해 2008년 분데스리가 1부리그에 진입하게 된다.


독일축구협회는 2014년 의결을 통해 "한 구단에 20년 이상 큰 자금을 후원한 개인 또는 기업은 해당 구단의 50+1룰을 면제받는다"는 예외조항을 만들었고, 이 덕분에 호프가 호펜하임의 소유권을 갖게 되었다. 명백히 디트마르 호프 한 사람을 위한 예외조항이었기에 독일 내에서 논란이 컸다고 한다.


이후 축구팬은 호펜하임 구단을 조만장자의 취미활동쯤으로 폄하하며 "공공의 적"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예외가 결국 50+1룰의 와해를 가져올 것이고, 분데스리가도 돈 많은 재벌의 돈잔치로 오염되고 입장료는 영국처럼 치솟을 것이라 우려한다. 바이에른 뮌헨뿐 아니라 도르트문트, 묀헨글라트바흐 등 "성깔"로 유명한 서포터는 몇년째 디트마르 호프를 비난하는 플래카드나 응원송을 만들어 호펜하임과의 경기 중 여러차례 항의 시위를 벌인바 있다.


물론 독일 내에서도 50+1룰의 폐지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 현재의 구조에서는 어차피 각팀이 돈을 쓸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바이에른 뮌헨의 독주를 막을 방법이 없고, 챔피언스리그 등 국제 교류전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50+1룰이 폐지되고 몇 팀 정도는 천문학적인 돈을 써서 세계적인 스타를 영입하고 챔스에서 성적도 내고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을 도맡아하는 것도 깨져야 더 재미있노라 이야기한다.


이 두 상반된 의견을 가진 이들이 동시에 주목하는 팀이 바로 RB라이프치히다. 라이프치히는 레드불 기업에서 창단한 팀. 물론 50+1룰을 지켜야 하여 레드불이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계속 막대한 돈을 쓰고 있다. 팀명인 RB는 라젠발(Rasenball; 잔디밭 공) 스포츠의 약자라고 주장하지만 이게 레드불의 약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체 축구를 풋볼Fußball이라고 하지 누가 라젠발이라 부른단 말인가.)


50+1룰 수호자는, 호펜하임의 예외를 보고 레드불이 돈을 퍼부어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참고로, 분데스리가는 신규 구단이 11~12부 리그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레드불은 가난한 5부리그 구단에게 수억원 가량의 돈을 주고 그 출전권을 사서 5부리그부터 출발해 순식간에 1부리그에 진입했다. 이 방식 자체는 합법이지만, 이렇게 뭐든 돈으로 떼우는 모습 때문에 라이프치히를 비호감으로 여기는 독일 팬이 많다고 한다.


50+1룰 반대자는, 라이프치히가 투자하며 적극적으로 나서니 바이에른 뮌헨의 독주가 위협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최근 몇년간 바이에른 뮌헨은 예년과 달리 손쉽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는 못한다. 그래도 결국 우승은 바이에른 뮌헨 몫이지만, "투자하는 팀"이 순위경쟁에 뛰어들어 리그가 더 재미있어지는 게 확인되었으니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관점의 차이일뿐.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수의 독일인은 축구판을 돈으로 오염시키는 걸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더 많은 투자로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것보다, 덜 비싼 입장료로 모든 경기를 빠짐없이 "직관"하며 그 열기를 즐기는 그 자체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자본의 논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이렇게 축구를 즐기는 나라가 하나쯤 있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보너스 이야기. 호펜하임은 원래 그 이름대로 호펜하임(Hoffenheim)이라는 작은 마을을 연고로 하는 팀이다. 그런데 디트마르 호프가 (아직 공식적으로 소유권을 갖지는 못하고) 팀을 장악한 이후 인근의 유명한 도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연고를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래서 현재의 진스하임(Sinsheim)으로 연고를 옮겼다. (호펜하임도 진스하임의 행정구역에 포함되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골에서 읍내로 이전한 셈이다.)


따라서 현재의 호펜하임 구단은 진짜 호펜하임과는 무관하다. 팀명은 바이에른 뮌헨인데 연고지는 뮌헨이 아닌 것과 같은 상황. 그렇다 보니 호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호펜하임을 Hoffenheim이 아니라 Hoppenheim이라고 부른다. "호프의 집"이라는 뜻이며, 호프가 자기 돈으로 구단 하나를 주무르는 걸 비꼬는 표현이다.


끝으로 영양가 없는 사족 하나. Hurensohn이라는 욕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영어의 son of b..와 단어상 의미가 같으나 독일에서는 일상생활에서 함부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매우 상스러운 욕설로 여겨진다고 한다. 그러니 경기장에 공공연하게 사용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을만한 일은 맞는 것 같다. 이 단어는 후레(Hure)의 자식(Sohn)이라는 합성어. 필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후레자식"이라는 단어와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지까지 찾아보았다. 당연히 아무런 연결고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