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두.유. Travel to Germany

#466. 전설의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요즘 낭만주의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이번 글은 독일 낭만주의와 분리할 수 없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독일에 워낙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을 쓰는 왕과 제후가 많다보니 구분을 위해 별명을 붙여 이야기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라고 적어주고, 그냥 바르바로사라고 줄이기도 합니다..


황제 재임기간이 1155년부터 1190년까지. 그러니까 굉장히 오래 전, 거의 제국 초창기의 인물입니다. 그 전까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지는 않았었고, 교황청의 대관을 받은 독일왕이 로마황제의 칭호를 가졌는데, 바르바로사가 최초로 '신성로마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바르바로사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이라는 뜻입니다.

워낙 오래 전 인물이라 초상화 등의 자료는 없습니다만, 실물에 가장 근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얼굴이 바로 위 사진의 흉상입니다. 황제의 대관식이 열린 1155년으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은 어떤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제작자인 오토 폰 카펜베르크(Otto von Cappenberg)는 바르바로사가 태어났을 때 대부가 되어준 사람입니다. 굉장히 가까운 사람이 동시대에 황제 대관을 축하하며 제작했으니 당연히 실물에 가까운 얼굴 아닐까요? 카펜베르크의 바르바로사 흉상(Cappenberger Barbarossakopf)은 카펜베르크성(Schloss Cappenberg)의 수도원에 보관 중입니다.


그는 황제와 교황의 권력다툼이 치열했던 신성로마제국 초창기에 황권 강화에 힘썼습니다. 특히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재임 내내 노력하였는데, 이탈리아왕의 칭호도 얻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것에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붉은 수염'이라는 별명을 독일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로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업적은 대부분 알프스 이남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 시기 유럽은 십자군 원정이 한창일 시기입니다. 바르바로사 역시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는데, 앞선 황제들은 기사와 군대를 보내고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던 반면 바르바로사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떠나 용맹한 임금의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마치 영국의 아더왕처럼, 독일인에게는 바르바로사가 전설 속 용맹한 황제로 소환됩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먼 원정에 나선 기사의 모습이 투영된 이유도 있고, 십자군 원정길에서 숨을 거두어 영웅화된 이유도 있어 더더욱 전설로 남기 적합했을 것입니다.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고 시신의 부패를 막기 어려워 결국 타국에 안장된(=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스토리도 전설에 살을 붙이기 좋은 소재가 되었죠.

낭만주의가 독일을 휩쓴 19세기 후반, 독일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민족성을 강조할 '도우미'로 바르바로사 황제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독일 곳곳에 바르바로사와 관련된 기념물이 들어섭니다. 고슬라르(Goslar) 카이저팔츠 궁전 앞에 나란히 선 기마상의 주인공이 독일을 통일하고 첫 황제가 된 빌헬름 1세, 그리고 바르바로사 황제입니다. 이 정도면 바르바로사를 우대하는 게 가히 최상급이라고 해도 되겠죠.


언젠가부터 이런 전설도 만들어졌습니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독일 중부 튀링엔 지역의 산 아래 잠들어있으며, 그가 다시 눈을 뜨는 날 그의 기사들과 함께 독일의 적을 물리치고 제국을 완성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히틀러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때 작전명을 바르바로사라고 했답니다. 이제 바르바로사 황제가 눈을 뜨고 소련을 물리치고 게르만 제국을 완성할 거라는 상징을 투영한 거죠. (물론 결과는 아시듯이 처참한 패배입니다만.)


전설 속에서 바르바르사 황제가 잠들어있는 신비로운 산은 키프호이저입니다. 낭만주의에 심취한 독일인이 이런 자리를 놔둘리 없죠. 산 위에 거대한 기념비를 만들었습니다.

키프호이저 기념비(Kyffhäuserdenkmal), 다른 말로 바르바로사 기념비(Barbarossadenkmal)라 불리는 이곳. 긴 수염이 북슬북슬한 이가 바로 바르바로사 황제입니다. 그러면 그 위에 말을 탄 더 큰 이는? 빌헬름 1세입니다. 두 황제가 세트처럼 붙어다니는 곳이 종종 있어요. 이런 게 낭만주의를 지배 이데올로기에 활용한 예시라 할 수 있겠죠. 전설의 붉은 수염은 그렇게 독일인의 마음 속에 하나의 아이콘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