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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67. 독일의 남과 북을 모두 지배한 유일한 군주

독일 내에도 일종의 지역감정이 존재합니다. 상대를 향한 비방이나 혐오가 아니라 높은 라이벌 의식이 드러나는 관계라고 해야겠네요. 가장 클래식한(!) 지역감정은 남부와 북부의 경쟁심일 것입니다. 독일 남부와 북부는 완전히 극과 극이에요. 산업구조, 종교, 국민성, 기후 등이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반대입니다. 방언 차이도 심하고요.


그런데 독일 남부와 북부라고 뭉뚱그려 표현하지만,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한자동맹의 영향권이었던 북부 상업도시와 알프스 아래 바이에른 남부가 극과 극이라고 보면 됩니다. 북부 상업도시의 대표가 함부르크, 바이에른 남부의 대표가 뮌헨입니다. 독일에서는 이들 지역을 각각 저지(낮은 땅)와 고지(높은 땅)로 부릅니다. 알프스가 높이 솟은 남부가 고지, 산을 찾기 어려운 북부가 저지입니다. 독일 북부와 바로 이웃한 네덜란드(Nederland)가 "낮은 땅"이라는 뜻이죠. 남부와 북부의 언어는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라 하여 완전히 별개의 언어처럼 이질감이 큽니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저지독일어는 거의 소멸되었고, 고지독일어를 표준으로 하여 지역별 방언차가 존재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고요. 표준 독일어는 한 번 따로 글로 정리했던 적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참조해주세요.

이처럼 완전히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인 독일 북부와 남부를 동시에 지배한 사람이 역사상 딱 한 명 존재합니다. 가령, 독일제국의 통일 황제 빌헬름 1세만 하더라도 국가의 구성은 연방제였기 때문에 각 지역의 주정부가 따로 존재하였으므로 전체를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빌헬름 1세도 하지 못한 일을 했던 사람, 바로 하인리히 사자공(Heinrich der Löwe)입니다. 12세기에 활동한 제후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기 전 독일왕국이 잠깐 등장했을 때, 왕국은 소위 게르만 5대부족의 제후국의 연합체였습니다. 국가의 기틀을 만든 5대부족이 작센족, 바이에른족, 슈바벤족, 프랑켄족, 로타링기아족입니다. 이것을 기틀로 하여 작센 공국, 바이에른 공국, 슈바벤 공국, 프랑켄 공국, 로타링기아 공국이 생기고, 각 공국을 다스리는 제후를 대공이라 불렀습니다. 이후 공국은 계속 분열되고, 새로 확장한 영토에 또 다른 나라가 생기는 등 점차 복잡해집니다만, 신성로마제국 초창기에는 이들 5대 부족공국이 상당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입니다.


오늘날 작센은 독일 동부에 있으며, 대표 도시가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작센은 오늘날 함부르크가 있는 독일 북부 해안 지대부터 평야 지대까지가 공국의 영토였습니다. 이 지역을 오늘날에는 니더작센(Niedersachsen)이라 부릅니다. 저지대의 작센이라는 뜻이죠.


바이에른은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뮌헨이 있는 독일 동남부 지대였습니다. 처음에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까지 바이에른 공국에 속하였으나 영토가 분할되면서 지금의 영역으로 줄어들었고, 그 대신 초창기 프랑켄 공국의 땅을 19세기 들어 바이에른이 흡수했기에 영토는 다시 넓어졌습니다. 이렇게 바이에른에 편입된 프랑켄 지역이 뉘른베르크 부근이고요.


하인리히 사자공은 원래 작센 공국의 대공이었습니다. 매우 용맹하고 호탕하여 "사자공"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계속 동쪽으로 영토전쟁을 벌여 땅을 넓혔습니다. 그가 획득한 지역이 오늘날 베를린이 있는 독일 동부 지역에 해당됩니다. 이때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였는데요. 그는 이탈리아 공략에 심취하느라 정작 본토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력한 제후인 하인리히 사자공을 포섭하여 우군으로 삼고자 바이에른 공국을 사자공에게 주었습니다.


사자공은 1142년부터 작센의 대공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0대 초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영토를 넓히며 황제의 눈에 들어 바이에른 대공을 겸하게 된 것이 1156년입니다. 작센 대공 하인리히 3세, 바이에른 대공 하인리히 12세가 그의 정식 칭호였고요. 몹시 혼동할 수 있어서인지 그냥 사자공이라 부르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는 독일 북부에 상업도시를 여럿 건설하였습니다. 상인에게 자율을 보장하여 상업이 크게 융성하였고, 이것이 훗날 한자도시가 탄생하고 한자동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가 건설한(또는 적극 지원한) 도시는 사자상을 세워 그를 기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슈베린, 뤼베크 등 독일 북부를 여행하는 중 사자가 눈에 띄면 십중팔구 사자공과 관련 있다고 보면 됩니다.

반면, 독일 남부는 당시만 해도 시골이나 마찬가지였고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외적의 침략을 받기 쉬운 변방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바이에른 공국에서 상업과 국방의 거점이 될 도시가 필요하다 판단하여 새로 건설한 도시가 바로 뮌헨입니다. 그 전까지 뮌헨은 수도사가 정착하여 수도원 주변에 촌락이 형성된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나 하인리히 사자공 이후 바이에른의 주요 도시로 크게 발전합니다.


작센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이 서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 사자공은 완전히 끄트머리에 떨어져 있는 두 나라를 성공적으로 다스린 것은 물론 그 와중에 이민족을 정벌하며 영토까지 넓혔습니다. 그렇다고 전쟁에만 심취한 게 아니라 상업을 융성하여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높은 안목도 보여주었죠.


바르바로사 황제는 어쩌면 사자공이 너무 커진 게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견제를 시작합니다. 이미 커버린 사자공은 황제의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그러던 중 황제가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며 사자공에게 군대를 요구하는데, 사자공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 원정에서 바르바로사 황제군이 크게 패하였고, 황제는 협조하지 않은 사자공에게 책임을 물어 1180년에 작센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의 영지를 몰수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자공이 눈엣가시였던 다른 제후들도 동조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사자공에게서 빼앗은 바이에른 공국을 다른 귀족에게 주었는데, 이때부터 비텔스바흐(Wittelsbach) 가문의 바이에른 통치가 시작되어 1918년까지 지속됩니다. 작센 공국은 여럿으로 쪼개어 여러 귀족이나 주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 가문이 통치한 바이에른은 계속 큰 나라로 존속하며 영향력을 발휘한 반면, 북부는 여러 도시국가가 형성되어 (사자공이 남긴 밑천인) 돈을 무기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형태로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그러면 사자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고 추방되어 노르망디 지역에 은둔하였습니다. 바르바로사 황제가 십자군 원정길에 숨지어 새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즉위한 뒤 그에게 윤허를 베풀어 독일에서 말년을 보낼 영지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자공은 유일한 영지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에서 1195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대공비 마틸다와 함께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공주였습니다. 수백년 뒤 벨프가문의 영지는 제법 확장되며 수도를 하노버(Hannover)로 옮겼고, 벨프가문의 친척 관계인 베틴가문 출신의 하노버 제후 게오르크 1세는 후사가 없어 왕위가 끊긴 잉글랜드의 국왕을 승계하여 조지 1세가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영국 왕실을 승계하는 하노버 왕가(1차대전 후 독일을 향한 반감을 고려해 가문의 이름을 윈저로 변경)의 기원입니다. 사자공의 처가댁을 사자공의 후손 친척이 정식으로 접수한 셈입니다.

마지막 이야기. 뮌헨과 바이에른에서도 도처를 장식한 사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사자공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자공의 몰락 이후 바이에른 공국을 접수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문장에 사자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이에른의 상징이 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