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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독일뉴스

News | 독일과 나미비아의 과거사 정리, 어디까지 왔나.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홀로코스트 등 무수한 악행을 철저히 사죄하고 배상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웃의 모 나라와 적나라하게 비교되는 덕분에 한국에도 종종 뉴스로 보도되곤 한다. 그러면 이웃의 모 나라를 두둔하고픈 소수의 사람들은 독일의 행위를 깎아내리기 위해 이런 말을 한다. 독일도 아프리카의 약소국에게는 사죄하지 않는 이중성을 가졌다고.


그 약소국으로 거론되는 나라가 나미비아다. 그리고 독일인은 나미비아에서 수만명을 학살한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독일의 식민지배에 항거한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 헤레로족의 80%, 나마족의 50%가 몰살당했다. 홀로코스트보다 나을 게 없는 악행에 대하여 독일이 사죄하지 않는 이중성은 무엇일까?


일단 사실관계를 정정하자면, 독일은 나미비아에게 국가 차원에서 사죄하였다. 모 나라와 달리 유감 정도가 아니라 정식으로 사죄하였다. 몇해 전에는 독일 대통령까지 나서서 과거사를 사죄하며 나미비아와 공동 선언문을 낼 것이라고 했는데, 막상 나미비아측의 비협조로 선언문은 채택되지 않았다. 아무튼 독일이 나미비아에 저지른 일에 대하여 충분한 책임의식을 여러차례 비추었고, 2015년부터 지금까지 양국 대표단이 협상 중이다.


어쨌든 2010년대 중반까지 독일이 나미비아에게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중적이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면 독일은 왜 사과가 늦은 걸까?


아프리카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에서 땅따먹기를 하듯 식민지를 개척할 시절 아프리카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은 나미비아라는 나라를 강제 점령하고 식민 통치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땅을 구매한 뒤 남서아프리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우고 원주민을 지배하며 수탈하였다.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그 땅에 살던 여러 부족 중 둘이었다.


1차대전이 끝나고 패전국 독일은 해외에 개척한 식민지를 모두 빼앗겼으며 이 과정에서 남서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연방(현 남아공)에 위임되었다. 말이 위임이지 그냥 1차대전 승전국인 영국의 식민지인 남아프리카연방에서 거저 먹은 것이다. 이후 남아프리카연방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오늘날의 남아공에 이르고, 남서아프리카가 나미비아라는 이름의 독립국이 된 것은 1990년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독일이 열심히 과거사를 사죄하던 2차대전 이후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나미비아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독일이 못된 짓을 저지른 땅을 지배한 다른 나라(남아공)에 사죄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 엄밀히 말해 나미비아는 독일이 식민통치한 나라가 아니라 식민통치한 지역에 새로 건설된 나라로 보는 게 옳다.


둘째, 나미비아의 현 정권은 헤레로족 나마족과 관련이 없다. 독일이 사죄하려면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나미비아 정부가 그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두 부족은 현재 나미비아의 일부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이 되어 있다. 만약 독일이 나미비아에 배상금을 물어준다치자. 어차피 그 돈이 헤레로족과 나마족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가를 건너뛰고 민족에게 배상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다.


그래서 독일은 나미비아에게 배상금이 아닌 개발원조의 명목으로 1990년 이후 지금까지 8억 유로를 지불해 왔다. 그 시기는 독일도 갓 통일을 이루어 막대한 통일비용을 지출하며 사회가 혼란스럽던 시절. 그 핑계를 대고 모른척할 수도 있는데 어려운 형편에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며 책임의식은 보여왔다.


또한 독일은 현재 베를린에 재건 중인 프로이센 왕궁에 식민통치의 과거를 고백하는 전시관을 만들 준비를 끝낸 상태다. 당연히 헤레로족과 나마족에게 저지른 학살도 공개될 예정. 연구한답시고 헤로로족과 나마족을 학살한 뒤 유골을 독일로 가지고 왔는데 2018년에는 현재 남아있는 유골을 나미비아에 되돌려보내주었다. 과거사를 감추고 왜곡하는 이웃의 모 나라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된다.

▲협상을 가로막는 이유가 돈(액수)인지 말(배상금 표현)인지 묻고 있다.


며칠 전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에서 나미비아 관련 뉴스가 보도되었다. 독일에서 1천만 유로를 제안했으나 나미비아에서 모욕적이라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나미비아 정부와 협상 중인 독일 대표는 1천만 유로라는 구체적인 액수를 거론한 적 없다고 한다. 나미비아가 거절한 정확한 이유도 알려지지 않았다. 배상금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측만 전해진다.


독일 협상단 대표는 "빨리 사과하고 싶다"는 말까지 반복한다. 나미비아 대통령은 이를 거부한다. 이 과정에서 진짜 사과받아야 할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배제되어 있어 부족 대표단체에서 협상 자체를 무효로 하라는 반대까지 나온다고 한다. 일례로, 나미비아에서 돈 대신 전기, 통신, 도로 등 사회시설을 독일이 만들라는 요구도 제시했는데, 정작 그 개발대상지역은 헤레로족 나마족과 무관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사과하려는 사람은 있으나 사과받을 사람이 없는 나미비아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아마 이 협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최소한 이것만큼은 이야기할 수 있다. 독일이 강대국을 상대로만 사과하는 이중성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는 것. 부끄러운 역사를 외면하고 거짓으로 덮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이웃의 모 나라가 저지른 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독일을 폄하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