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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72. 거인 빌리 브란트

우리가 살면서 미국 대통령 이름이나 들어보았지 서양의 정치인 이름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지만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많은 사람이 들어본 이름입니다. 서독의 총리였죠. 그가 글로벌급 유명인이 되도록 만든 게 바로 이 한 장의 사진입니다.

1970년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찾아 게토 기념비 앞에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울면서 사죄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2차대전 중 저지른 과오에 대한 참회였습니다. 나치 독일에 짓밟혀 엄청난 피해를 입은 폴란드인은 이 광경을 보며 마음을 열었습니다. 서독 총리가 방문한다고 하자 "땅을 빼앗아가려 나치 점령군이 또 찾아오느냐"고 대놓고 반발했으나 이 "무릎꿇기"를 본 폴란드인도 독일을 용서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바르샤바 무릎꿇기(Kniefall von Warschau)"라 부릅니다. 독일의 전쟁범죄 참회의 상징이기도 하고, 냉전 시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화해의 제스처로서 중요한 의미도 가집니다. 빌리 브란트는 이듬해 197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빌리 브란트의 사과를 보며 폴란드인은 "사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사과한다"고 했답니다. 빌리 브란트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하다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피신하였고 이때부터 사용한 가명이 빌리 브란트였습니다. 노르웨이인으로 신분을 속여 독일로 잠입해 활동하다가 노르웨이 시민권을 획득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스웨덴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머무는 동안 계속 반나치 활동을 하였습니다.


목숨 걸고 나치에 반대했던 이가 나치의 범죄를 대신 사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과할 필요 없는 사람이 사과한다"는 말이 나온 거죠. 그만큼 해묵은 감정을 풀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의 진심이 폴란드인의 마음을 울렸고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사독이든 동독이든 독일이라고 하면 나치의 잔상이 너무 강하여 국제적으로 비호감이었는데, 독일인의 이미지를 확 바꾼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빌리 브란트는 뤼베크(Lübeck)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이 없고 아버지의 이름은 딱 한 번 들어봤다고 합니다. 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입니다. 프람은 그의 모친의 계부(외할아버지)의 성입니다. 외할아버지의 성을 받았다는 게 곧 사생아라는 뜻이기도 하기에 그가 정치활동하는 중 그의 정적들은 노골적으로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 대신 프람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뤼베크에는 빌리 브란트 하우스(Willy-Brandt-Haus) 기념관이 있으며, 그의 사후 뤼베크시에서 조성하였습니다. 그가 태어나거나 거주했던 건물은 아니라고 합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서독 국적을 재취득한 뒤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서독에서 정치를 시작한 그는 서베를린의 연방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1957년 서베를린 시장으로 당선됩니다. 이후 낙후된 서베를린을 복구하는 데에 큰 공을 들였고 유명 명소인 샤를로텐부르크 궁전(Schloss Charlottenburg)의 궁전을 복원한 것도 그의 재임 중이었습니다.


그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 중이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었습니다.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베를린 장벽에 몹시 격노하였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 벽을 세우면 사람들의 심리도 남남으로 멀어지게 되어 분단이 고착화될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나이도 많고 전쟁도 불사하는 강경파인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내심 그의 라이벌로 빌리 브란트를 염두에 두며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데, 베를린 장벽 설치를 알고도 묵인했던 케네디 대통령은 빌리 브란트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서독 문제에 협력해야 했고, 1963년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나도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서베를린이 공격 받으면 자신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기에 베를린 장벽으로 혼란을 느끼던 서베를린 시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일약 전국구 인기 정치인이 되었으며, 단순히 인기만 높은 게 아니라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그의 정책 비전이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가 속한 사민당은 만년 2위 정당이었는데, 빌리 브란트의 역할로 여당인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대등한 위치에 올랐고 대연정으로 국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정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1969년 총선에서 또 사민당은 2위를 하였지만 이번에는 자민당과의 연정을 성사시켜 과반이 되지 않은 기민당을 제치고 사민당이 집권당이 되어 빌리 브란트가 드디어 서독 총리에 오르게 됩니다.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쭉 이어갑니다. 동독 및 소련과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동구권 국가와 국교를 맺고 관계를 개선합니다. 1970년 "바르샤바 무릎꿇기" 사건도 바로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에 앞서 1970년 1월에는 서독 총리로서는 최초로 동독의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전임 총리인 아데나우어는 "동독과 수교한 나라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동구권 국가를 철저히 무시하던 중이었습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독을 포함한 동구권 국가를 동등한 파트너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무력으로 정벌하여 통일할 적국이 아니라 함께 나아갈 동반자로 설정하여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하고 평화로 나아갔죠. 덕분에 1971년부터 베를린은 더 이상의 군사적 긴장 관계 없이 모처럼의 평온한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베를린을 사랑했고 베를린 장벽에 분노했으며 분단에 슬퍼했던 거인이기에 베를린은 특히나 그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도시입니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빌리 브란트 포럼(Forum Willy Brandt)이 시내 중심에 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한 그의 일생이 여러 자료와 함께 무료로 전시된 기념관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빌리 브란트가 서독 내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았을 것 같죠? 그런데 실제로는 아닙니다. 국민의 절반은 그를 매우 싫어했다고 해요. 누구 마음대로 동독을 동반자로 인정하느냐는 거죠. 동독에 적개심을 가진 국민일수록 빌리 브란트의 정책에 반대하였습니다. 하필 빌리 브란트의 비서가 동독 간첩이었음이 발각되면서 빌리 브란트 역시 책임을 지고 1974년 총리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됩니다. 불과 5년의 총리 임기였으나 그가 남긴 발자국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후에도 빌리 브란트는 사민당 대표직을 유지한채 유럽을 돌며 사회주의 운동과 유럽 통합운동에 힘썼고 동방정책이 훼손되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분단국인 한반도의 평화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통일에 앞장 선 당시 재야 정치인 김대중과 돈독한 관계였다고 전해집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89년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습니다. 빌리 브란트는 자신이 평생 염원했던 그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나라를 순방하던 중이었거든요. 그 나라가 한국입니다.


평생의 원을 다 이루었다 생각했을까요. 독일의 통일을 지켜본 뒤 78세의 나이로 본(Bonn)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1992년 서거합니다. 통일 당시 서독의 총리는 사민당이 아닌 기민당의 헬무트 콜(Helmut Kohl)이었으나 정당에 상관없이 동독을 포용하고 평화로 나아가는 기조가 확실히 자리를 잡았기에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빌리 브란트의 이름이 국내에 많이 거론되었습니다. 어떤 정치인이 마치 빌리 브란트를 연상케 하듯 광주의 기념비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사죄를 표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의미있는 변화라 평하고 누군가는 정치적 쇼라고 평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빌리 브란트의 일화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게 있습니다. 비 맞으며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그의 모습이 폴란드 국민의 마음을 녹인 건 사실입니다만 정치외교가 감성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에 갔던 것은 사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폴란드와 국교를 정상화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선물로 빌리 브란트는 2차대전 후 독일이 폴란드에 빼앗긴(소련 마음대로 그어버린 국경에 따라) 땅의 영유권을 앞으로도 포기한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나중에 독일이 강해진 뒤에 다시 그 땅 내놓으라고 폴란드를 괴롭힐 일 없다는 약속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친하게 잘 지내자, 독일이 통일하고 강대국으로 나아가더라도 폴란드가 지지해달라, 그런 여러가지 의미를 담은 약속입니다.


이것은 서독 내에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영토를 포기하느냐는 반발이었죠. 그 땅은 나치가 불법 점령한 게 아니라 원래 독일 땅이었던 곳, 당연히 독일인이라면 그 땅을 빼앗긴 게 억울하다고 생각할 만하죠. 충분히 납득 가능한 반발입니다. 그래서 서독 내에서 국민의 절반은 빌리 브란트를 싫어한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더 큰 것을 얻은 양보였던 셈이지요.


서두에 적은 것을 다시 봐주세요. 폴란드인은 빌리 브란트가 방문한다고 하자 "땅을 빼앗아가려고 나치 점령군이 또 찾아오느냐"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해당 영토의 반환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가 담긴 반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상회담 후 해당 영토를 포기한다고 명확히 선언하니 더 할 말이 없죠. 빌리 브란트의 사과가 그냥 쇼가 아니라 진심이구나, 독일인과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빌리 브란트를 거론되게 만든 그 정치인에게 묻습니다. 사과가 끝입니까, 아니면 지지자의 격렬한 반감을 부를 것을 각오하고 통 크게 양보할 것을 가지고 왔습니까. 사과만 하고 끝난다면 그것은 쇼입니다. 설령 참회의 마음은 진심이더라도 그것은 쇼입니다. 역사왜곡 방지를 위한 입법이나 지금 진행 중인 관련인의 재판 등을 통해 (설령 지지자의 절반이 등을 돌리는 한이 있어도) 실체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그것이 진짜 사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