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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78. 이상적인 중세 독일왕의 롤모델

"유럽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롤루스 대제(카를 대제)의 초상화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작품입니다. 뒤러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데요. 뉘른베르크 시의회의 의뢰를 받아 카롤루스 대제의 그림을 완성하여 오랫동안 뉘른베르크 시청사에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은 뉘른베르크의 게르만 국립박물관(Germanisches Nationalmuseum)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럽 역사를 통틀어 매우 중요한 인물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지라 이 그림의 사본이 곳곳에 있어요. 베를린의 독일 역사박물관,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보물관 등에도 전시되어 있으니 유럽 여행 중 스쳐지나간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뒤러는 1500년대의 사람입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대의 사람이죠. 당연히 뒤러는 카롤루스 대제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차림을 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그림은 그의 상상 속에서 탄생한 "유럽의 아버지"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른손에는 보검을, 왼손에는 보주(십자가가 달린 구슬)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망토와 장갑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보검은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는 군사영웅의 이미지를, 보주는 십자가의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라는 기독교 수호자의 이미지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풀 세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대관식을 치를 때 착용하는 레갈리아였습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는 신성로마제국 이전의 고대 왕이므로 당연히 이러한 차림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뒤러는 중세 독일왕은 이러해야 한다는 상상을 더하여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를 전파하며 유럽을 정복하는 군주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셈이며, 이것이 중세 독일왕에게 요구되는 최상의 책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뒤러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아니, 뉘른베르크 시의회는 왜 이런 그림을 의뢰했을까요? 

바로 이 왕관 때문입니다. 뒤러가 그림을 그린 시점을 기준으로 불과 몇십년 전에 뉘른베르크에 카롤루스 대제의 왕관이 도착했습니다. 당시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보헤미아왕이었는데요. 그의 고향인 뉘른베르크를 사랑해서 보물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몇십년 뒤 뉘른베르크에서는 이 왕관을 쓴 카롤루스 대제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서 뒤러에게 의뢰했단 것입니다.


이 왕관은 현재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보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진짜 카롤루스 대제의 왕관은 아니라고 합니다. 훗날 역사가들이 밝혀내기로는 10세기경 독일 남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아무튼 그 시절에는 이게 "유럽의 아버지"의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품'들도 모두 실제로 존재합니다. 왕관과 함께 빈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도 카롤루스 대제의 것은 아니지만 발견 당시에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레갈리아입니다.


이 보물들을 뉘른베르크로 가져온 황제 지기스문트의 초상화도 뒤러의 손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레갈리아를 착용한 똑같은 크기의 초상화를 만들어 카롤루스 대제의 초상화와 함께 나란히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물론 뒤러가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황제의 사후였기에 기존에 남아있는 그림을 가지고 상상력을 보태 만든 작품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신성로마제국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유럽 너머에서 침략하는 이민족으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하고 또 반대로 영토를 넓혀 기독교의 영역을 확장하는 게 황제의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뒤러의 이 작품은 훗날 자리를 이을 황제에게도 롤모델을 제공한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람이 뒤러입니다. 직접 그린 자화상입니다. 독일에 몇 안 되는 르네상스 화가 중 한 명이며, 쭉 뉘른베르크에서 살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살던 집은 오늘날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그가 살던 시절의 모습과 그의 주요 작품을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