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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79. 오스트리아 황제와 황후, 그리고 헝가리 이야기

여행을 하기에 어려운 시절이어서 독일과 무관하지 않은 여러 나라의 여행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았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은 슈테판 대성당을 비롯하여 정말 많은 교회 건축물이 즐비하죠. 네오고딕 양식의 보티프 교회(Votivkirche)도 인기가 높습니다.

보티프(Votiv)는 '봉헌'이라는 뜻입니다. 오스트리아 황제 암살 기도사건이 벌어졌는데, 황제가 천운으로 목숨을 건졌어요. 이에 황제의 형제(이면서 멕시코 황제)가 국민의 기부금을 모아 신께 감사하는 의미로 성당을 지은 것입니다.


바로 이 암살 위기를 넘긴 황제가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입니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서도 빈 체제에 저항하는 혁명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합니다. 사실 페르디난트 1세는 정신병력이 있어 온전한 통치가 어려운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조카가 새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프란츠 요제프 1세입니다.


즉위 당시 18세의 청년이었는데  장수하면서 무려 68년간 황제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시기가 오스트리아의 격동기였고, 실질적으로 그가 마지막 황제(후임이 1명 있으나 존재감이 없으므로)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인에게는 마치 한국의 고종 황제처럼 쇠락해가는 나라의 마지막을 쥐고 버틴 안쓰러운 임금으로 기억되는 이미지입니다.


1848년은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겠다며 혁명을 일으킨 해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진압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헝가리인에게 몹시 나쁜 이미지였겠죠. 1853년 헝가리 독립운동가가 황제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신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것이라며 보티프 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암살미수 사건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미혼이었는데, 아들이 암살당할뻔한 것을 본 모후가 혼인을 종용하여 즉각 황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급하게 혼인을 치르려니 평소 왕래가 있으면서 혼사를 치를만한 공주가 있는 다른 왕가를 급하게 물색해야 했고, 프로이센 왕실과의 혼사가 틀어진 뒤 바이에른 왕국을 통치하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공주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혼인을 추진한 공주는 따로 있으나 황제는 그 여동생이 마음에 들어 17세의 엘리자베트 공주가 황후가 됩니다. 엘리자베트 황후의 별명이 시시(Sisi)입니다.

엘리자베트는 대단한 미인이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만, 자유분방한 바이에른 왕실에서 자란 탓에 오스트리아 황실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격식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황실에서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는 신세였죠. 남편과의 관계도 좋을 수가 없었고요.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고자 병적으로 식단 조절에 집착하여 사는 동안 날씬한 몸을 유지하고 의복과 화장에 공을 들입니다. 마치 요즘의 연예인처럼, 본인이 아름다워보이는 것에 온 힘을 쏟으며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참고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약혼한 곳은 황제의 별장이 있는 온천 휴양지 바트 이슐(Bad Ischl)이었습니다. 몇십 년 후 바로 이곳에서 황제는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벌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입니다.


이 시기 헝가리는 독립에 실패하고 더욱 가혹한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헝가리인의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 생각했어요.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는 처지가 오버랩되었겠죠. 그녀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헝가리와의 대타협에 큰 역할을 합니다.


오스트리아는 점점 쇠락해가는 처지였기에 헝가리, 보헤미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등 제국이 지배를 받는 민족을 힘으로 누르기 어려워졌고, 헝가리의 독립운동은 저지했지만 또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일이었죠. 결국 헝가리인을 공동 지배세력으로 인정하여 그 힘으로 보헤미아 등 다른 피지배 민족을 누르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엘리자베트 황후가 다리를 놓고 대타협이 이루어져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출범합니다.

이제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헝가리 사도왕을 겸하며 헝가리의 통치자로 군림하지만 헝가리의 자치권이 보장되고 주요 결정을 헝가리 의회가 공동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독립은 아니지만 독립에 준하는 권한을 얻게 된 거죠. 그 다리를 놓은 인물이기 때문에 엘리자베트 황후는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에서 기념물을 여럿 만날 수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엘리자베트 황후가 유독 헝가리를 챙기며 입장을 대변해주고 헝가리어도 유창하게 구사했기에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헝가리의 수상(총독)인 언드라시 줄라(Andrássy Gyula)와 불륜 관계가 아니었느냐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황후와 황제의 사이가 워낙 나빴던 것도 이런 소문에 한 몫 거들었을 것이고요. 하지만 딱히 불륜의 증거가 나온 건 없다고 하니 그냥 풍문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출범 후 이제 오스트리아 황제는 빈에서 6개월, 부다페스트에서 6개월을 체류합니다. 어쨌든 두 나라의 정식 통치자니까 공평하게 체류하는 거죠. 부다페스트에서는 대타협을 축하하며 황제에게 부다페스트 근교에 있는 괴될뢰 궁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황제와 황후는 1년 중 절반동안 여기에 머물렀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헝가리인 입장에서 자신들을 지배하고 탄압한 오스트리아 황실이 마냥 좋지는 않았겠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출범 후에도 황후는 지지를 받아도 황실은 비호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듬해 헝가리에서 황제의 막내공주가 태어났어요. 헝가리에서 태어난 공주를 보며 헝가리인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막내공주의 이름을 딴 마리 발레리 다리입니다. 에스테르곰에 있습니다.


공주가 헝가리에서 태어난 비화도 재미있어요. 오스트리아 황실을 싫어했던 황후는 자신의 아들이 헝가리에서 태어나야 헝가리 왕이 되어 이 나라를 독립시킬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죠. 어쨌든 그렇게 헝가리에서 태어난 공주가 양국의 우호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황제와 황후의 사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황위를 계승할 황태자는 딱 한 명(루돌프 황태자)뿐인데 그는 노골적으로 황제의 통치 스타일을 비판하며 자유주의를 주장했고, 심지어 가명으로 매체에 황제를 비판하는 글까지 기고했다고 합니다.


부모의 사이는 소원하고, 황제인 아버지는 속된 표현으로 꼰대 같이 느껴지고, 자신의 꿈을 펼치기는 어렵고, 황태자 자리는 부담스럽고, 결국 루돌프 황태자는 1889년 자살을 택하였습니다. 이후 엘리자베트 황후는 더더욱 현실 도피가 심해져 그 전에도 그랬지만 남은 생애 동안 주로 여행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1898년 황후가 스위스 제네바를 여행하던 도중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테러를 당해 숨지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습격당한 뒤 바로 응급처치를 했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평소 날씬한 몸에 집착한 황후는 코르셋으로 몸을 꽉 조이고 있었고 검은 옷을 입고 있던지라 피가 흐르는지도 몰랐다고 해요. 손 쓸 타이밍을 놓치고 황후는 숨을 거둡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합스부르크 황실 묘지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입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묘 오른쪽(사진으로는 왼쪽)이 엘리자베트 황후의 묘, 반대쪽이 루돌프 황태자의 묘입니다.


혹시 뮤지컬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이름들이 익숙할 거에요. 엘리자베트 황후의 스토리로 만든 뮤지컬이 <엘리자벳>, 루돌프 황태자의 스토리로 만든 뮤지컬이 <더 라스트 키스>입니다.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 제작하였고, 국내에서도 공연하였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쇠락해가는 제국을 떠받들다가 결국 1914년 1차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위 스토리에서 보았듯 황제에게는 이제 황태자가 없었고요. 서열 승계에 따라 죽은 동생의 아들, 즉 조카가 황태자가 되었는데 사라예보에서 괴한의 피습으로 숨집니다. 이것이 1차대전의 발발 원인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숨을 거두었고,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패전국으로 제국이 해체되고 맙니다. 헝가리도 이때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