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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83. 실패했지만 성공한 혁명,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나폴레옹이 쫓겨난 뒤 오스트리아 주도로 유럽의 질서를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는 '빈 체제'가 출범합니다. 빈 체제에 따라 옛 신성로마제국 구성국은 독일 연방(Deutsche Bund)이라는 이름 아래 일단 다시 모였습니다. 없어진 제국을 되살릴 수는 없으니 독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어 사용국가들이 마치 신성로마제국 시절처럼 느슨하게 묶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독일 연방의 리더였죠.


하지만 역사는 뒤로 돌아가지 않는 법. 이미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눈을 뜬 독일인(=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런 미완성 형태의 국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통일국가의 수립을 요구하는 외침이 점차 커집니다. 강력한 실권을 쥔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은 이런 외침을 애써 외면했죠. 그러다 프랑스에서 1848년 2월 혁명이 성공하여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독일인도 참지 않고 거리로 뛰어나왔습니다. 독일의 3월 혁명입니다.


3월 혁명으로 인해 '빈 체제'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는 쫓겨납니다.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오늘날 베를린의 인기명소인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 Tor)의 뒤편 광장 이름이 3월 18일 광장(Platz des 18. März)입니다. 3월 13일 혁명이 일어났고, 수비대의 발포로 사상자도 발생했으나 3월 18일 이 자리에 다시 모인 군중의 더욱 격렬한 저항 앞에 결국 군대도 물러섭니다. 프로이센 왕은 산처럼 쌓인 시민군의 시신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 연방은 구성국마다 국민 선거로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연방의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인구수에 비례하여 선출된 의원의 수는 총 585명. 교수, 판사, 변호사 등 지식인층 중산층 위주로 선출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구성국이었기에 독일 연방에도 속해있던 보헤미아(모라비아 포함)는 선거를 거부하고 대표를 뽑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지역 대표가 모두 모인 연방의회가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에서 열렸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사 뢰머에서 먼저 의장단을 선출한 뒤 축포 소리와 함께 파울 교회(Paulskirche)에 입장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제헌의회입니다. 새로 출범할 국가의 헌법을 만드는 셈이었기에 논의할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통일국가를 만든다면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현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지배한 독일 연방 바깥의 영토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둘째, 통일국가의 리더는 누가 될 것인가.


각국에서 뽑혀 참석한 이들은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지식인층 중산층 위주로 구성되다보니 정작 국민 중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노동자 계층을 대변할 인물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은 강력한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국민의 대표로 의회가 구성되었다는 것은 이제 군주의 권한이 국민에게 이양됨을 뜻합니다. 강제로 권한을 빼앗기 어려우니 자발적으로 권한을 넘겨달라고 황제와 왕에게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었죠.


회의는 매우 오래 걸렸습니다. 1년이 지난 1849년 5월, 헌법이 힘들게 채택되었습니다. 두 가지 큰 쟁점은 이렇게 결론 지었습니다. 통일 국가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한정한다, 그러므로 독일어 비사용 지역의 비중이 큰 오스트리아는 통일 국가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른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주의에 입각하여 독일인의 통일 국가의 틀을 정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므로 당연히 리더는 프로이센이 될 수밖에 없으니 프로이센 국왕을 통일국의 황제로 추대하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추대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군주의 권한은 신이 내리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권력관에 빠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한낱 인간들이 나를 황제로 추대한 뒤 꼭두각시처럼 의회의 결정을 따르라는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죠. 보수적인 그는 애당초 국민의회에 비우호적이었습니다. 결국 입헌군주제는 좌절되고, 가장 중요한 권력구조조차 정하지 못하자 국민의회는 급속도로 와해됩니다.


"이건 망했다"고 생각한 의원들은 알아서 퇴장하고 사라졌고요. 국민의회가 탐탁치 않은 구성국은 자국 대표단을 물리적으로 소환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합니다. 겉으로는 헌법에 입각한 국민의 나라를 만든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으나, 독일인이 지배하고 있던 보헤미아 헝가리 등 타민족의 인권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타민족을 지배하는 군주의 권력을 놔둔채 자기 나라에서는 의회에 권력을 넘기라는 게 말이 되나요. 신성로마제국 이래 이어지는 복잡한 영토와 권력관계는 국민의회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회는 중요한 씨앗을 심었습니다. 적어도 독일인은 1848년 혁명을 마음 속에 담아두게 되었습니다. 흑-적-금 삼색기를 흔들며 독일인의 통일국가를 요구하던 외침이 실현 직전까지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일인은 계속 통일국가의 수립을 염원하였고, 실제 통일국가가 탄생한 것은 불과 22년 후입니다. 그게 1871년 독일제국입니다. (위 그림은 국민의회가 열리는 내내 회의장 상단 높은 곳에 걸려있던 게르마니아 여신의 초상입니다. 실존하지는 않지만 독일인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게르만의 통일국가를 여신의 형상을 빌려 그린 작품이며, 오늘날 뉘른베르크에 원본이 있습니다.)


독일제국이 출범하기 전부터 프로이센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왕이 독일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좌충우돌 밀어붙인 것처럼 보였던 헌법은 실제로 결실을 맺은 셈입니다. 이상을 추구하다가 현실에 부딪혀 실패한 혁명이지만, 그 이상은 현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마 독일인에게 "국가의 출발"을 묻는다면 대부분 1871년을 이야기하면서 그 뿌리는 1848년 혁명이라 이야기할 것입니다. 아마 오스트리아인에게 "국가의 출발"을 묻는다면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가가 권력을 잡은 1000년 전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같은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렇게 또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