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두.유. Travel to Germany

#480. 중세에 여행이 있었다.

중세에도 유럽의 사람들은 여행을 다녔습니다. 여권도 없고 영토전쟁도 빈번한 시대였지만 사람들은 틈틈이 여행을 다녔습니다. 등산을 했을까요? 낚시를 했을까요? 해변에 누워 일광욕을 즐겼을까요? 비행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는데 뭘 타고 다녔을까요?


그 시절 여행의 주제는 "성지순례"였습니다. 기독교 문화권 위에 세워진 유럽인만큼 일상에 종교적 색채가 강하였고, 성지순례는 매우 중요한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자동차도 없던 시절, 당연히 대부분의 여행자는 걸어다녔습니다. 몇날 며칠을 걷고 또 걸으며 성지를 찾아갔습니다. 이쯤에서 혹시 생각나는 게 있지 않나요? 한국 여행자에게도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바로 이러한 중세 여행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면 성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평생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동경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이들은 주로 유럽 내에서 중요한 성자가 안장된 곳이나 유품이 보관된 곳 또는 기적이 발현된 곳 등을 찾아갔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방박사 3인의 유골함이 있는 곳. 이런 곳이 성지였죠. 동방박사 3인이 쾰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쾰른으로 찾아갑니다.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역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인 성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 코스이죠.


쾰른에 많은 순례객이 찾아옵니다. 이들이 어디서 잘까요? 무엇을 먹을까요? 당연히 돈 주고 숙소를 찾고 돈 주고 먹을 걸 사 먹어야죠. 순례객이 쓰는 돈은 쾰른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여행업과 알고리즘이 똑같아요.


오랫동안 걷는 그 과정이 신앙을 수련하는 고행의 과정이라 생각하였고, 그 와중에 동행인을 만나 다른 세상의 이야기도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견문을 넓히고 평생 기억할 감동을 얻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역시 오늘날 사람들이 여행을 즐기는 이유와 똑같습니다.


성지순례는 그 시절의 여행이었습니다.

동방박사 3인의 유골함은 처음에는 쾰른의 허름한 성당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순례객을 다 맞이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니 쾰른에서는 이에 걸맞은 큰 대성당을 만들게 됩니다. 허름한 성당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대성당을 지었습니다. 이것이 독일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쾰른 대성당입니다.


쾰른 대성당이라는 으리으리한 성전이 있어서 유골함이 이곳에 옮겨진 게 아닙니다. 유골함이 먼저 도착했고, 순례객이 찾아왔으며, 이를 감당할만한 성전을 새로 지은 게 쾰른 대성당입니다. 여행업은 이렇게 도시의 풍경을 바꾸고 스케일을 키웁니다.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가능하죠. 동방박사 3인이 쾰른에서 숨을 거둔 것도 아닐 텐데 유골함이 어쩌다 쾰른에 도착했을까요?


12세기 이탈리아 원정을 떠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밀라노를 정복하였습니다. 밀라노 대주교는 황제에게 우호증진의 표시로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동방박사 3인의 유골함을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수백년 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서 밀라노로 옮겨진 보물이었다고 합니다.


황제는 자신에 우호적인 쾰른 대주교에게 선물로 유골함을 주어 쾰른에 보관토록 하였습니다. 이런 보물 하나면 쾰른에 어마어마한 경제유발효과가 생길 것을 알고 선물한 거죠. 오늘날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유골함은 그 시절 쾰른에서 다시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자 아무개의 유골함, 성자 아무개가 입었던 옷, 성자 아무개의 심장 등이 안장되어 있다는 성당이나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혹자는 그 진위여부를 묻습니다. 사실 진짜가 아닐 확률이 더 높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가짜를 진짜라고 날조하여 사기치는 것은 아니고요. 교황이나 대주교로부터 또는 왕이나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니 진위를 따지는 것 자체가 불경하죠. 진짜인 줄 알고 극진히 모시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켜 온 그 정성만큼은 진짜가 분명합니다.


아무튼 교황이나 황제 등 권력자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또는 자신의 우호세력에게 혜택을 주고자 이런 식으로 성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도시는 여행업 덕분에 부유해졌습니다. 이것이 중세의 여행입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