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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82. 하노버 방언이 표준 독일어가 된 이유

고대 로마제국이 유럽으로 진출하면서 라인강 서쪽, 도나우강 남쪽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라인강 도나우강 건너편은 "춥고 척박한 땅"이라며 정벌하지 않고 그곳에 사는 민족을 "게르만족"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사실 게르만족은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여러 부족이 다들 자기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의 언어도 달랐어요. 하지만 로마인이 듣기에는 어차피 다 미개한 민족이 쓰는 거기서 거기인 언어라 생각했기에 이들의 언어를 하나로 지칭하면서, 이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게르만족으로 통칭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인이 게르만족을 멸시(?)하면서 하나의 언어로 지칭한 그 이름이 바로 도이치(Deutsch)의 어원입니다. 독일어죠.


훗날 1871년 독일제국이 출범할 때 수백년간 각각 다른 국가와 문화를 가지고 살던 이들을 하나로 묶은 구심점도 언어였습니다. 프로이센도, 바이에른도, 작센도, 하노버도, 뷔르템베르크도, 모두 문화와 역사는 달라도 "도이치"라는 언어를 쓰는 것은 같았거든요. 그래서 다른 환경에 살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독일어는 오늘날 독일이라는 나라가 탄생할 수 있게 해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여러 언어를 그냥 대충 퉁쳐서 "도이치"라고 부른 셈이니 원래는 하나의 언어가 아니잖아요. 독일어는 각 지역별로 방언차가 매우 심했고, 특히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라는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외국어 수준으로 차이가 심했습니다. 그러던 독일어가 하나로 통일되는 시발점이 1500년대 한 사람의 성직자에 의해 제시됩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종교개혁을 시작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이라 하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다툼이니까 특정 종교의 사건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기독교 문화 위에 세워진 유럽에서 종교개혁은 곧 대륙의 근간을 뒤흔들고 권력 패러다임을 뒤엎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종교인이 언어의 통일과 민족성 확립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을 이해하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순간의 유럽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에 쏠쏠한 도움이 되는 교양과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성지를 따라가며 종교개혁의 핵심을 만나는 시간을 다음달에 마련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많은 신청 바랍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의 통일에 기여한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아이제나흐(Eisenach)의 바르트성(Wartburg)에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교황과 주교 등 성직자의 부정부패가 심한 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성직자가 이야기하면 무조건 진실이라 믿을 수밖에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알아야 부패한 성직자의 가르침을 구분할 수 있다 생각하여 성서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전까지 성서는 라틴어나 헬라어로 적혀있어 아무나 읽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제나흐는 튀링엔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루터가 주로 활동한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는 작센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고지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고지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출간하였고, 이것이 독일 전국에 퍼져 모든 사람이 같은 독일어를 읽는 계기가 되어 독일어의 표준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독일어는 하층민의 언어나 마찬가지였기에 체계화되지 않고 변변한 문법 체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단어 하나 잘못 사용해도 그 의미가 바뀌어버리므로 루터는 대단히 신중히 단어를 채택하고 문장을 배열하였기에 독일어의 문법이 탄생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물론 학문으로서 체계화 된 독일어 문법은 수백년 뒤 그림형제 등 언어학자에 의해 완성됩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독일 표준어는 문법(쓰기)의 성격이 강합니다. 모든 국민이 같은 독일어를 읽고 이해하는 것에 의의를 둡니다. 그러다 모든 국민이 같은 언어를 말해야 한다며 발음과 억양까지 체계를 잡은 것은 독일제국 출범 이후인 1876년부터였다고 하고요.


기존에 저지독일어를 사용하던 지역에서는 고지독일어에 바탕을 둔 표준어가 사실상 외국어나 다름없었습니다. 외국어를 의무적으로 배우는 셈이었죠. 당연히 가장 정석대로 모범적으로 하나하나 읽고 쓰는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덕분에 저지독일어를 사용하던 니더작센 지역에서 표준 독일어를 가장 정확하게 발음하게 되어 오늘날 표준 독일어가 하노버(니더작센의 주도) 지역의 언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구분할 것은, 하노버 지역의 방언이 아니라 하노버 사람들의 발음과 억양이 표준 독일어에 가장 가깝다고 정리하는 게 정확합니다.

저도 독일어를 배울 때 "하노버 방언이 표준어"라는 식으로 들었고, 그래서 앞선 글에서 이와 같은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더러 있었고, 이 글의 제목도 편의상 그렇게 적었는데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하노버 방언이 아니라 하노버 사람들의 발음과 억양이 표준 독일어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정정합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