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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86. 계몽군주에 대하여

정말 뜬금없이 계몽군주가 논란이 되는 요상한 세상입니다. 계몽군주의 대표자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제 영역에 속하는지라 남의 일 같지 않아 한 편의 글로 계몽군주라는 말이 같는 의미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계몽군주 발언을 비난(비판이 아님)하는 언론을 보니 계몽군주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하더군요. "계몽 사상가의 영향을 받아 합리적이며 개혁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군주"라고요. 와, 무슨 위인이나 성군을 보는 것 같아요. 언론이 틀렸습니다.


계몽군주를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나는 계몽 된 우월한 존재, 내가 제일 잘났어,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고칠 수 있어, 내가 무지몽매한 백성을 깨울 수 있어, 그러니 백성은 나한테 복종해야 돼" 정도 되겠습니다. 제일 잘났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진짜 유능할 수도 있고 그냥 '자뻑'일 수도 있습니다.


계몽사상 자체는 진보적입니다. 그 영향으로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고요. 필연적으로 계몽사상은 일반 민중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계몽군주는, 일반 민중이 각성하여 왕정을 무너트리기 전에 먼저 군주가 계몽사상을 독점한다는 개념으로 보면 됩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민중이 들고 일어나기 전에 군주가 제도를 개혁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중이 들고 일어날 일 자체의 싹을 제거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개혁을 하기는 하죠. 군주의 입맛에 맞는, 또는 군주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 개혁을 하죠. "옛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정도의 개혁입니다.

모든 언론이 계몽군주 발언을 비난하면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언급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대표적인 계몽군주인 건 맞아요. 많은 개혁을 단행한 것도 맞아요.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국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마냥 합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독일인을 다스리면서 독일인을 무시하고 독일어도 사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만 스스로 솔선수범하면서 여러 악습을 타파하고 개혁을 완수했기 때문에,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에 대왕으로 칭송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와 같은 다른 계몽군주는 대부분 실패한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제프 2세 역시 수많은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무엇 하나 변변하게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계몽군주의 개혁은 백성이 들고 일어나는 걸 미리 차단하는 구실인데 이게 실패하면 결국 백성이 들고 일어납니다. 오스트리아 역시 일부 지역에서 백성의 봉기가 일어났고요. 요제프 2세 사후 오스트리아는 점차 국력이 쇠하여 독일의 주도권을 프로이센에게 빼앗깁니다.


계몽군주의 정식 표현은 계몽절대군주인데요. 여기서 "절대"로 번역되는 absolutism은 "전제주의"라는 뜻입니다. 전제주의는 곧 전체주의이며 독재를 의미합니다. 칭찬이 아니에요.


한국 언론이 이렇게 단어 하나 꼬투리 잡아서 씹어댈 때 대개 발언의 맥락을 무시하고 앞뒤 잘라먹은 경우가 많아 이번에도 보나마나 그랬을 것 같은데요. 설령 다 잘라먹고 계몽군주라는 단어 하나만 살려서 왜곡하더라도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 계몽군주라는 단어가 칭찬이 아니니까요.


한 마디로, 계몽주의와 계몽군주를 구분하지 못해 벌어진 촌극입니다.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