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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89. 커리부어스트

11월에 진행할 독일 통일 30주년 기념 인문학강연 "독일 통일을 여행하다"를 준비하면서, 독일의 현대사가 만든 음식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독일 하면 생각나는 음식은 소시지라고 할 수 있겠죠. 소시지를 독일어로 부어스트(Wurst)라고 합니다. 부어스트의 종류가 참 많아요. 독일의 각 지역마다 특산품이라 할 만한 부어스트의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이번 글은 베를린의 특산품인 커리부어스트(Currywurst) 이야기입니다. 커리소시지 또는 카레소시지라고 풀이해도 적절하겠습니다.

커리부어스트는 독일의 가장 보편적인 소시지인 브라트부어스트(Bratwurst), 즉 구운 소시지에 커리소스로 양념하고 그 위에 커리가루까지 뿌려 완성합니다. 독일에는 흔하지 않은 향신료 맛이 들어가 다른 소시지와 맛의 결이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더욱 인기가 높은 것 같아요.


커리부어스트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49년 9월 4일 서베를린에서 탄생했어요. 당시 서베를린은 전후 복원을 위해 곳곳에 공사가 벌어지던 중이었기에 노동자가 많았으며, 이들은 짧은 시간에 끼니를 해결하며 스태미너도 보충할 부어스트를 즐겨 먹었습니다. 서베를린에서 부어스트 임비스(거리 노점)를 운영하던 헤르타 호이버(Herta Heuwer)가 커리와 케첩을 믹스하여 새로운 소스를 발명해 부어스트에 접목하였습니다. 처음 이름은 "슈페치알(스페셜) 커리 브라트부어스트"였는데, 1950년대에 줄여서 커리부어스트라는 이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녀의 소스는 1950년대 중반 칠업(Chillup)이라는 이름으로 상표권까지 등록되었습니다.

베를린 스타일의 커리부어스트는 아주 간단합니다. 부어스트를 익힌 뒤 구워서 한 입 크기로 자르고 커리소스와 커리가루를 듬뿍 올립니다. 여기에 감자튀김(포메스)을 사이드로 곁들이는데, 감자튀김에는 마요네즈가 궁합이 맞습니다. 물론 감자튀김은 주문 시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사이드디쉬이기는 합니다만 커리부어스트에 감자튀김이 없으면 못내 아쉽습니다. 이런 구성으로 일회용 접시에 담아 나오며, 그 자리에서 먹고 쓰레기만 버리면 되는 가벼운 길거리음식입니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떡볶이와 비슷해요. 길거리에 서서 후딱 먹고 떠나는 그런 간식의 개념입니다.

커리부어스트의 탄생 비화를 들어보면 조금 마음이 아픕니다. 2차대전 후 폐허가 된, 찢어지게 가난한 독일에 먹을 게 풍족할 리 없죠. 서베를린에 주둔한 연합군은 군용식량을 구호물품으로 서베를린 시민에게 제공했는데, 그 중 영국군의 구호물품에 커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은 오랫동안 인도를 식민지배했으니 자연스럽게 커리를 받아들인 상태였죠. 독일인에게 커리는 생소한 식재료지만, 이것을 마치 향신료처럼 활용해 독일 전통 부어스트에 접목하여 새로운 요리가 탄생한 셈입니다. 마치 미군의 구호식량에 들어있는 통조림 햄이 우리의 찌개문화와 결합해 부대찌개라는 새로운 음식이 탄생한 것과 유사한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커리부어스트를 일컬어 "독일판 부대찌개"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커리부어스트 음식점도 베를린 곳곳에 있습니다. 가령, 이 콘놉케 임비스(Konnopke's Imbiß)는 1960년대에 동베를린에서 최초로 커리부어스트를 판매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철이 다니는 철교 아래에 자리 잡은 허름한 임비스의 역사가 100년에 육박하고, 서베를린에서 탄생한 커리부어스트를 동베를린에 최초로 전파했다는 스토리까지 더해집니다. 이처럼 커리부어스트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커리부어스트 식당은 커리36(Curry36)이 아닐까 합니다. 장사가 잘 되어서 베를린에 분점도 몇 개 차렸어요. 하지만 그런 유명한 식당도 이렇게 작고 허름합니다. 커리부어스트가 길거리음식으로 떴다고 했죠. 그러니 유명한 식당도 비주얼이 이런 게 당연합니다. 착석해서 먹는 건 애당초 관심 밖이고요. 서서 후딱 먹거나 그냥 들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먹는 데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커리부어스트는 향이 강한 케첩과 같은 붉은 소스가 핵심인 만큼, 칠리 소스를 더해 매운 맛을 내는 것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입맛에는 매운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독일 음식 중에서 이 정도로 매운 맛을 내는 음식이 없어요. 프랑크푸르트의 커리부어스트 프랜차이즈인 베스트 보어쉬트 인 타운(Best Worscht in Town)은 캡사이신을 더해 진짜 매운 맛을 내는 커리부어스트를 팝니다. 한국 식당처럼 매운 맛의 단계를 조절해 주문할 수 있어요. 이런 것도 독일에서 커리부어스트 외에는 발견하기 어려운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베를린에는 커리부어스트 박물관(Deutsches Currywurst Museum)까지 있었을 정도로 이 음식은 그 자체로 독립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베를린을 넘어 독일 전체에서 사랑 받는 간식입니다. 독일 여행 중 꼭 한 번은 먹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가격도 매우 부담 없는 수준입니다. 참고로, 커리부어스트 박물관은 2018년 12월에 문을 닫아 현재는 운영되지 않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