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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정보/아이제나하

Eisenach | #12. 바르트 성 (a.k.a. 바르트부르크 성)

a.k.a. 바르트부르크 성 | Wartburg라는 이름이 바르트 성이라는 뜻인데, 국내에서는 바르트부르크 성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관용처럼 굳어졌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곧 "바르트 성 성"이 되므로 명백히 잘못된 표기이기는 하지만 워낙 널리 사용되기에 여기서 함께 소개한다.


아이제나하뿐 아니라 독일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역사적 가치가 높은 바르트 성(Wartburg). 그 이름을 그대로 풀이하면 기다림(Wart)의 성(Burg)이 된다. 튀링엔(Thüringen) 지방의 루트비히 백작의 지시로 1067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루트비히 백작은 이 지역을 지나가던 중 성을 짓기 적합한 높은 산을 발견하고는 "기다려라, 산이여! 그대는 나를 위한 성이 되어야 한다!(Warte, Berg, du sollst mir eine Burg werden!)"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뒤 얼마 후부터 건축을 시작하였다. "기다림의 성"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하였으나 이후 궁전이 추가되면서 지역 영주들이 대대로 거주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 곳에서 영주들은 음유시인(Minnesänger)을 불러 경연대회를 열었고, 이러한 문화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에게 영감을 주어 <탄호이저(Tannhäuser)>라는 오페라를 낳게 하였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뒤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이 성에 은둔한채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루터는 불과 11주만에 신약성서 전체를 번역하였으며, 이 때 그가 정리한 독일어가 현대 독일어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전에는 각 지방마다 방언 형태로 천차만별이던 독일어가 하나로 정리된 것이 이 시기부터. 그러니 루터의 종교개혁은 단지 개신교 내의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독일 전체를 뒤흔든 커다란 족적이었던 셈이다.


1817년에는 독일학생연합의 멤버 450명이 이 곳에서 민족주의 행사를 개최하였고, 이후 바르트 성을 학생운동의 본부로 사용하게 된다. 이들이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았고, 행사 당시 이들이 흔들던 삼색(검정,빨강,금색) 깃발이 오늘날 독일 국기의 세 가지 색깔이 되기도 하였다.


동서 분단 당시에는 아이제나하가 동독에 속하였는데, 지리적으로 서독과의 경계에 가까웠기 때문에 동서독간의 교류가 있을 때 바르트 성이 주요 장소가 되었다. 19세기의 첫 독일 통일뿐 아니라 20세기의 마지막 독일 통일에 있어서도 바르트 성이 주연을 담당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바르트 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성의 안뜰과 탑은 무료 입장 가능. 궁전으로 사용된 성의 내부는 가이드를 동반한 유료 입장으로 둘러볼 수 있다. 또한 루터가 신약성서를 번역한 루터의 방(Lutherstube), 괴테(Goethe)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작은 박물관 등도 유료 관람에 포함된다. 


참고로 내부 유료 입장 후에 사진을 촬영하려면 입장권 외에 사진촬영권을 추가로 구입해야 한다. 사진촬영권을 구입하면 나눠주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어야 촬영을 허가한다. 사진촬영권이 없어도 박물관과 루터의 방은 촬영이 가능하다. 가이드 투어 구간에서만 촬영이 금지된다.


입장료 : [확인]

개장시간 : [확인] / 영어 가이드투어는 13:30 한 차례만 실시


* 찾아가는 법 (본 블로그의 추천일정을 기준으로 합니다.)

로이터-바그너 박물관(Reuter-Wagner Museum) 앞 바르트부르크 대로(Wartburgallee)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10번 버스를 타면 바르트 성의 주차장까지 데려다준다. 주차장에서 성까지는 약 5분 정도 산을 올라야 한다. 만약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약 30~40분 정도 등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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