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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246.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관

대도시 베를린(Berlin)의 시내 한복판, 큰 빌딩을 지어도 돈 좀 만질 것 같은 알짜배기 땅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덤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정식명칭은 학살당한 유럽의 유대인 기념비(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줄여서 홀로코스트 추모관(Holocaust-Mahnmal)이라고 부릅니다.


* 국내에서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라고 적는 자료도 더러 있습니다만, 굳이 한국어를 놔두고 메모리얼이라는 외래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의 수가 600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이들은 유대인 외에도 많습니다. 슬라브족, 장애인, 동성애자, 집시, 매춘부 등 온갖 사람들을 온갖 이유를 들어 잡아가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600만명이나 학살당한 정도는 아닙니다. 홀로코스트가 꼭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유대인을 먼저 연상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전에는 꼭 비석 같이 생겼다 생각되어 홀로코스트 추모비라고 적었는데, 비석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군집이어서 홀로코스트 추모관으로 표기를 정정하였습니다. 이 조형물을 실제로 독일어로 석비(石碑; Stele)라고 표현하고는 있습니다.


이 네모난 콘크리트 석비의 개수는 총 2,711개. 폭과 너비는 다 똑같고 높이만 다르다고 합니다. 게다가 바닥도 일부러 굴곡을 주었기에 마치 물결이 치는듯한 모습입니다. 여담이지만, 2,711개라는 숫자 자체가 가진 의미는 없고, 이 추모관 부지에 나란히 배열했더니 그 개수가 된 거라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더 밑으로 꺼지고 석비의 높이는 높아집니다. 완전히 바깥 세상과 고립된듯한 느낌이 들고 미로 속에 들어온 기분입니다. 지나가면 안 되는 곳은 펜스가 있으나 대부분 아무런 안내도 방향표시도 없이 좁은 통로가 교차합니다. 갑자기 눈앞에 사람이 쑥 지나가고, 옆을 쳐다보니 사람이 날 보고 있고, 혼란스럽습니다. 물론 어느 방향이든 끝으로 나가면 큰 길이니까 이 안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만 가장 깊숙한 곳, 그러니까 추모관의 중심부에서는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가장자리의 석비는 낮게 설치되었습니다. 걸터앉아도 될 정도의 높이인데요.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기 앉아서 토론하고 의견을 나눠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즉, 추모를 목적으로 만든 공간이지만 걸터앉는 등의 행위는 허용됩니다.


단, 아래 행위는 금지된다고 안내문이 붙어있습니다.

1. 큰 소리로 떠들지 말 것

2. 석비 사이를 뛰어넘지 말 것

3. 개나 다른 동물을 데리고 오지 말 것

4. 자전거 또는 유사한 탈 것을 가지고 들어오지 말 것

5. 흡연과 음주를 하지 말 것


그러니까 안전을 위협하거나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는 당연히 금지하는 것이고, 망자에 대한 예의만 갖춘다면 여기서 뭘 하든 관계없습니다. 그렇게 일상의 공간 속에 "엄숙하지 않게" 녹아드는 추모관이라는 게 인상적입니다.

최근에 방문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보강재를 두른 석비가 많이 보이더군요. 콘크리트에 균열이 생긴 것들을 보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가 2005년에 문을 열었으니 15년 가까이 된 콘크리트 구조물들입니다.


지하에는 박물관도 있습니다. 학살당한 유대인의 편지나 일기, 사진, 그림 등 실제 피해자의 흔적을 전시한 공간입니다.

입장은 무료이지만 내부가 좁은 편이라서 한 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입구 앞에서 직원이 막고 있다가 적당한 인원만 순서대로 들여보내기 때문에 사람이 많을 때에는 오래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코라 베를리너 거리(Cora-Berliner-Straße) 방면입니다. 큰 길의 반대편 골목입니다.

보통 추모관이라고 하면 추모의 대상에 집중하게 하는 게 일반적이죠. 홀로코스트 추모관은 그 반대입니다. 집중할 대상이 없고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엄숙한 추모의 마음을 가질 것이고, 누군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낄 것이며, 누군가는 잠깐 쉬었다 가는 공원처럼 대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쩌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바로 그 일상적인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었노라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요?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1월 27일)을 맞이하여 가장 인상적인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