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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042. 스파이 브릿지의 무대

독일이 분단되고 베를린도 분단되었던 시절, 흉물스러운 베를린 장벽이 살아있던 시절, 서베를린에 주둔한 미군과 포츠담(베를린 근교 도시)에 주둔한 소련군은 경계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냉전시대로 불리던 그 당시 세계 여기저기에서 미국과 소련의 충돌이 잦았지만, 이처럼 미군과 소련군이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공간이 흔했던 건 아닙니다. 가령, 전쟁까지 벌어진 한반도에서도 미군과 소련군이 직접 대치했던 건 아니니까요.


여차하면 핵무기를 가진 초강대국의 전쟁판이 벌어질지도 몰랐던 그 시절,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물 밑에서 은밀하게 서로 거래할 것은 거래했습니다. 중요한 포로는 상호 교환하기도 했었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미군이 주둔한 곳과 소련군이 주둔한 곳 사이에는 다리 하나 있을 뿐입니다. 그 다리 양편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대치하고 있고, 포로만 다리를 건너 자기 진영으로 넘어가죠. 포로로 잡힌 스파이를 몰래 교환했던 다리라고 하여 이곳을 "스파이 브릿지"라고 불렀습니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는 여기서 벌어진 포로 교환의 가장 최초이자 극적인 순간을 다룹니다. 미군에게 체포된 소련의 스파이, 소련군에 격추되어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 그들이 비밀리에 맞교환 됩니다.

그 다리가 글리니케 다리(Glienicker Brücke)입니다. 한강대교처럼 큰 다리가 아니에요. 전력으로 달리면 30초 이내에 주파할 수 있을 짧은 다리입니다. 130m도 안 되거든요. 여기는 베를린과 포츠담의 경계입니다. 베를린에 주둔한 미군과 포츠담에 주둔한 소련군이 직접 대치하던 현장이기도 하죠.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서 다루는 포로 교환 사건은 1962년에 있었습니다. 이후 1986년까지 미군과 소련군의 포로 교환이 이곳에서 벌어집니다. 과연 "스파이 브릿지"라는 별명은 괜한 게 아니었습니다. 다리가 길지 않으니 소총의 사정거리 내에 있는 양편에서 적군이 육안으로 보이는 긴장감 넘치는 장소였겠지요.

당연히 일반인이 다리 위에 오를 수 없었구요. 쓸 일이 없으니 다리도 점차 훼손되었겠죠. 동독은 이 다리를 "통일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서독에서 다리의 보수 비용을 댈 테니 이름을 원래대로 글리니케 다리로 되돌려놓으라고 협상하여 관철됐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네요.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날부터 글리니케 다리의 경계가 해제되어 일반인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는 실제 글리니케 다리에서 촬영하였습니다. 포츠담은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영화 촬영도시입니다. 큰 세트장도 있어서 여기서 독일영화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도 여럿 촬영하였습니다. 포츠담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들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면서 아이러니한 사건이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다리이지만 보행자도 건널 수 있으니 한 번 올라가보세요. 포로가 된 기분으로 맞은편으로 걸어가보세요. 반세기 전 실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볼 수 있습니다. 프라하의 카를교나 런던의 타워브릿지처럼 다리 자체가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글리니케 다리를 찾아가보고, 건너보고, 바라볼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러면 왜 다리 이름이 글리니케 다리일까요?

프로이센 왕국 시절 왕자의 별궁으로 만든 글리니케 궁전(Schloss Glienicke)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넓은 깨끗한 호수가 있는데, 호수의 이름도 글리니케 호수입니다. 이 호수를 건너는 다리라서 이름이 글리니케 다리가 되었습니다.

글리니케 다리에 오르면 글리니케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도 보너스로 얻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 호수는 실제 호수는 아니구요. 하펠 강이 흐르다가 지형 때문에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지역입니다. 강이던 호수이던 어떻습니까. 호수로 보이면 호수처럼 감상하면 되는 거죠.


흔히 "영화에 나온 장소"를 찾아가보는 여행테마도 인기가 높은데요. 단순히 영화에 나온 장소 정도가 아니라, 영화의 실제 사건이 벌어졌으며 그 사건을 다룬 영화가 촬영된 그 장소를 찾아보는 여행테마는 어떨까요. <스파이 브릿지>의 무대, 글리니케 다리입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