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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92. 누가 유적지에 페인트를 칠했나?

베를린(Berlin)의 대표명소이자 독일 민족의 중요한 유적인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 Tor)은 베를린 여행 중 반드시 들르게 되는 곳입니다. 저 역시 그동안 수없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2023년 가을 독일 취재 중 다시 한 번 들렀습니다. 밤에 찾아갔는데, 뭔가 달라졌다 싶은 기분이 들더군요.

기둥에 조명색이 왜 저러지 싶었는데, 뉴스를 찾아보니 페인트칠로 오염된 것이라고 합니다. 밝을 때 다시 보려고 다음날 오전에 갔더니 페인트를 지우는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독일의 기후변화 운동단체 라스트 제너레이션(Last Generation) 소속 활동가들의 소행입니다. 이들은 미술관에 전시된 명화에 음식물을 던지는 시위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일단 이들의 주장 자체는 급격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가령, 속도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에 속도제한을 적용하라(적정속도 이상으로 과속할수록 탄소배출이 심하기 때문), 항공유 면세를 종료하라(항공 운송분야는 에너지 전환에 소극적이므로) 등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있습니다.

 

때때로 고속도로 통행을 방해하거나 공항 활주로에 난입하여 공항을 마비시키는 등의 과격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많은 시민이 피해를 입고 막대한 비용 손실이 발생했죠.

 

고속도로 속도제한을 요구하며 고속도로에서 시위하는 등의 행위는 일단 인과관계는 있습니다. 그것이 적절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자신들의 주장을 과격하게 뒷받침하는 극단적 행위라 봐야겠죠. 그런데 미술품을 훼손하고,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이러한 행위는 기후변화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요? (일단 이들의 주장대로는, 문화유산을 소중히 보호하듯 지구를 소중히 보호하라는 메시지라고는 합니다만, 글쎄요.)

고압분사 방식으로 브란덴부르크문에 물(인지 다른 성분이 섞였는지는 모르겠지만)을 쏘며 페인트를 지우고 있었습니다. 오후 늦게 다시 가보았더니 인부들은 철수했는데 페인트 자국은 다 지우지 못했더군요. 아마 여러 차례에 걸쳐 조금씩 지워나가려나봅니다. 기후위기에 항의하는 이들 때문에 오히려 쓸데없는 자원 낭비가 발생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단 독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유럽 전역에서 환경단체의 시위가 과격해집니다. 자신의 손에 본드를 발라 길바닥에 붙여버리고 통행을 방해하는 등의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지 못하게 아예 신체를 도로에 붙여버리는 겁니다. 갈수록 세상이 극단적으로 치닫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허용되는 유럽에서 합법적인 시위가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이것이 최선인가, 하는 복잡한 생각을 들게 하는 현장이었습니다.

 

이제 유럽에서는 "기후 테러리스트"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올바른 메시지를 올바르지 않은 수단으로 주장할 때, 사람들은 메시지를 기억하기보다는 그릇된 수단만 기억하기 마련입니다. 정작 사회의 변화는 더 더디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