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독일의 물가 - ③ 판트(재활용 환급제도)
그렇다면 과연 판트(Pfand)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제도가 있다. "공병환급"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병에 들어있는 소주나 맥주를 살 때 제품가격에 공병환급금 몇십원이 붙어있고, 나중에 공병을 가져가면 그만큼의 금액을 돌려주는 제도를 말한다.
말하자면, 판트가 독일의 공병환급 제도이다. 단, 병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페트병과 캔도 포함되므로 공병환급이라는 말보다는 재활용 환급제도라고 정리하는 편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물, 탄산음료, 쥬스, 에너지 음료, 맥주 등 대부분의 액체류에 판트가 적용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공병환급금을 실제로 돌려받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금액도 적기 때문에 굳이 번거롭게 돌려받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사정이 다르다. 기본 판트금액은 25 센트. 우리 돈으로 4~500원 정도 되는 비용으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제품을 살 때 이 비용을 지불한 것을 돌려받는 것이므로 검소한 독일인들은 열성적으로 판트 비용을 돌려받는다. 간혹 길거리에 이런 재활용 용기가 버려져 있으면 그것을 주워가는 사람도 많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쓰레기를 줍는 행위이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길거리에 떨어진 돈을 습득한 것과 같은 것이다.
판트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기본 판트는 25 센트, 그리고 일부 페트병은 15 센트, 마지막으로 유리병은 8 센트이다. 이 때 유리병은 거의 맥주병만을 이야기하며, 와인병 등 다른 종류의 유리병은 판트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 외 맥주병 중에서도 병따개가 부착형으로 제작된 것은 15 센트가 적용되고, 1 리터 이상의 대용량 맥주병은 50 센트까지 판트가 붙은 것을 구경한 적이 있다.
위 사진 속 마크를 기억하라. 이 마크가 붙은 제품에는 무조건 25 센트의 판트 비용이 추가된다. 혹시 이 마크가 붙은 빈 용기를 길거리에서 줍게 되면 25 센트 동전을 습득한 것과 같다. 나중에 빈 용기를 가져가면 다시 25 센트를 현금으로 돌려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는 길거리에서 버려진 판트가 보이면 바로 습득하여 휴지로 닦은 다음 환급처가 나올 때까지 가방에 넣고 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 25 센트를 돌려받으려면 어떻게 할까? 이런 종류의 음료를 파는 곳, 즉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돌려받을 수 있다. 꼭 구매처에 가야 할 필요도 없고 영수증을 보관할 필요도 없다. 거의 대부분의 기차역에 있는 로스만(Rossmann) 또는 요르마(Yorma's) 등의 매장에 가서 카운터에 빈 용기를 가져다주면 그 자리에서 환급금을 준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상관없고, "판트 비테(Pfand, bitte!)" 정도의 짧은 독일어로 이야기하거나 또는 위 사진 속의 판트 마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건네주면 의사소통은 문제 없을 것이다. 참고로, 마트에서는 아예 판트만 처리하는 기계가 있어 더 편리하지만 여행자가 시도해보기에는 난이도가 있다 생각되므로 부연하지는 않겠다.
* 현재 국내에 수입되는 독일 맥주 중 맥주캔에 위 마크가 붙어있는 제품이 몇 가지 있다. 국내에서 샀던 맥주캔을 시험삼아 독일에 가져가 판트를 시도해보았는데, 마트의 판트 기계에서 위 마크를 인식하여 25 센트를 환급받은 경험도 있다.
25 센트의 판트 외에 15 센트, 8 센트의 판트가 있는데, 이것은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환급 받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 낫다. 위에 언급한 로스만 등의 편의점에서는 25 센트 기본 판트의 환급만 취급하므로, 15 센트 판트 페트병이나 8 센트 판트 맥주병을 환급받으려면 대형마트로 가야 한다. 물론 독일에서 시내 중심가에 마트가 곳곳에 있으므로 굳이 찾아가려면 어렵지는 않지만, 마트에서도 되는 곳이 있고 안 되는 곳이 있기 때문에 현지에 거주하며 정보를 모으지 않는 이상 여행자가 그것을 구분하여 판트를 받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필자가 정확히 확인해본 것은 아니지만 눈치껏 살펴보니, 이런 재활용품을 수거하면서 마트에서 수익을 내는 것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재활용품을 모으고 처리하는 인력과 장소, 기계 유지보수 비용 등 더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정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다들 성실히 판트를 환급해주는 편. 그러니 25 센트 기본 판트만 환급해주고 나머지는 안 된다고 해서 타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위 사진은 15 센트 판트가 적용된 페트병. 판트 마크는 없으며, 위와 같이 별도의 안내로서 판트 비용을 표기한다. 맥주병은 별도의 표기도 없다. 무조건 8 센트가 동일하게 적용된다. 페트병이나 캔 중 간혹 판트가 제외되는, 그러니까 구매할 때부터 판트 비용이 추가되지 않는 제품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Pfand Frei(판트 프라이)"라고 별도로 안내된다.
여기서 판트와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
첫째, 독일 길거리를 걷다보면, 특히 날이 어두워질수록 점점 길거리가 지저분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길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주범이 담배꽁초와 깨진 병조각. 이 중 깨진 병조각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는 그냥 바닥에 던져 깨버리고 간 것이다. 맥주병의 판트 비용은 8 센트라고 이야기한바 있다. 우리 돈으로 100 원 정도의 적은 비용(실제로 독일에서 10 센트 미만의 단위는 거스름돈의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인데다 굳이 마트에 찾아가 돌려받아야 하니 환급을 포기하고 깨버리고 가는 것이다. 단지 취기 때문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맥주캔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지만 맥주병만 여기저기 버리고 깨트리고 있는 것은 취기가 아니라 판트 비용과 번거로움 때문이라고 정리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축구 경기나 축제가 있다면, 또는 젊은이들이 몰려나와 유흥을 즐기는 금요일 밤이 지나면, 온 길거리가 깨진 병으로 뒤덮인다. 처음에는 혹시 병조각에 다칠까 조심하다가도 나중에는 하도 흔하게 접하는 일상이다보니 병조각을 밟고 지나다니게 될 정도라고 하면 짐작이 가능할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맥주병도 25 센트의 판트를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장담컨데 독일의 길거리는 지금보다 몇 배 깨끗해질 것이다. 판트라는 제도 하나에도 독일 사회의 단면이 담겨있는 셈이다.
둘째, 축구 경기나 축제가 열려 사람들이 많이 몰려나오는 밤이 되면, 커다란 가방이나 보따리를 들고 나와 판트병만 전문적으로 수거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정부에서 고용한 미화원은 당연히 아니다. 판트를 모으고 모으면 꽤 짭짤한 부수입이 되기 때문에 이런 대목(?)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길거리로 나와 공병을 주워가는 사람들이다.
노숙자들에게도 판트는 귀중한 수입원이다. 이들은 쓰레기통까지 샅샅이 뒤진다. 25 센트짜리 캔이나 페트병을 2~3개만 주워도 맥주 1병을 사먹을 수 있으니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노숙자들이 불쌍히 생각되면, 음료를 다 마시고 난 뒤 빈 병이나 캔을 그냥 길거리 벤치 위에 놔두고 가자. 그들에게 소액을 기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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