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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126. 핵벙커에 관한 발칙한 상상

베를린의 쇼핑가인 쿠어퓌르스텐담(Kurfürstendamm)에는 스토리 오브 베를린(The Story of Berlin)이라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800년에 걸친 역사를 시대와 주제에 따라 23개 전시실로 구분하여 충실히 소개하는 역사박물관입니다.


이쯤되면 국가나 시정부 차원에서 운영할 것 같은데, 한 개인 수집가가 공들여 모은 자료들을 전시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역사박물관보다 더 전시의 카테고리가 방대하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스토리 오브 베를린의 23개 전시실 중 가장 마지막은 핵벙커(Atomschutzbunker)입니다. 이랬을 것이라고 흉내내거나 재현한 게 아닙니다. 진짜 핵벙커가 건물 지하에 있고, 그 건물에 박물관이 생긴 겁니다. 핵벙커는 1970년대에 만들어졌는데요. 아시듯이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죠. 언제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팽팽한 시기였는데, 서베를린에 핵벙커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베를린에 핵이 터질 것까지도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죠. 3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유사시에 서베를린의 지도부나 고위직 등이 대피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공개된 핵벙커와 관련된 정보입니다. 저도 당연히 책을 쓸 때 이 내용까지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항상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의문이 있습니다. 일단 서베를린에 벙커를 만들었다는 건 서베를린이 공격 받을 때 주요 인사라도 보호하겠다는 뜻일 것처럼 생각은 되는데, 한편으로는 소련이 서베를린에 핵을 떨어트린다는 건 자신들의 절대적인 우방인 동베를린도 같이 죽으라는 거잖아요. 과연 그런 일이 있을까, 만약 그 정도로 막나갈 상황이면 서베를린이 아니라 서독의 임시수도인 본에 떨어트리든지, 파리나 런던에 떨어트리든지, 워싱턴에 떨어트리든지, 그렇게 되어야지 동독도 같이 죽으라고 자폭을 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 겁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하게 됐습니다. 이 벙커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이 베를린에 핵미사일을 날릴 때 자국민은 보호해야 되니까 벙커를 미리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결론으로 넘어간 거죠. 서베를린에 거주하는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민간인들도 꽤 있었고 그 중 주요 인사도 있었을 테니까 그 정도만 보호하려는 목적이면 3600명 규모의 벙커로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특히 위치가 쿠어퓌르스텐담이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쿠어퓌르스텐담은 분단 시절 서베를린에서 "우리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산다"고 선전하려고 일부러 호화롭게 육성한 번화가입니다. 고급 백화점이나 상업시설이 즐비했죠. 다시 말해, 부자들이 많이 살았죠. 결국 서베를린에서 지켜주어야 했던 3600명은 이들 부자들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연합군이 베를린에 핵을 날리면 서베를린은 궤멸하지만 어쨌든 공산주의 진영의 최전선인 동독도 무너지는 거니까, 연합군 입장에서는 서베를린만 포기하면 적국의 전진기지를 날려버리를 수 있죠. 서베를린만 포기하는 거지 서독을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소련이 동베를린을 버리는 것보다 연합국이 서베를린을 버리는 게 더 가능성 높았다고 해도 억측이 아닙니다.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최악의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염두에 두고 대비를 했던 것은 미국 쪽이었다,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더군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발칙한 상상입니다. 개인의 상상을 책에 적을 일은 없으니 앞으로도 제 책에 이런 내용을 적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보도자료 받아적듯 뻔한 여행지 소개만 한국어로 번역해 전달하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아서 앞으로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보이면 이런 발칙한 상상은 계속 해볼 것 같습니다.


여기는 블로그니까, 즉 제 개인적인 공간이니까 이런 상상도 한 번 끄적여 봤습니다. 그러니까 두서 없는 여행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