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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239. 산꼭대기 십자가, 기펠크로이츠

독일 책 5권을 썼고 전국을 다 다녀봤다고 해도 아직도 독일에 대해 공부할 게 참 많습니다. 요즘에 독일 역사와 관련된 교양서를 읽고 난 뒤에 독일의 낭만주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중인데요. 우선 그 교양서가 어떤 책인지는 아래 리뷰를 참조해주시고,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낭만주의는, 문자 그대로 "낭만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낭만적"이라는 말이 좀 추상적이죠. 이렇게 이야기해볼게요. 아름다운 자연, 신비로운 전설, 자랑스러운 역사 등등 뭔가 감동을 주는 대상을 동경하는 가치관이라 하면 얼추 들어맞습니다.


낭만주의는 1800년을 전후하여 서유럽에서 크게 유행하는데, 당시 계몽주의의 여파로 곳곳에서 혁명이 일어난 직후입니다. 계몽주의의 절정이 프랑스혁명이었죠. 하지만 혁명 후에도 사람들이 원했던 유토피아는 등장하지 않았고 여전히 사회는 혼란합니다. 답이 없는 현실에 반발로 비현실적인 것에 빠져들게 되고, 아름다운 대자연, 신화 속에 존재하는 이상향 등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 낭만주의를 잉태합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기엔 제 지식이 부족하기도 하고 재미도 없어지니 우선 이 정도로 낭만주의의 개념을 잡아둡시다.

등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하자 많은 몸둥아리를 가진 작가는 유럽에서 거의 산에 오르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대중교통이나 케이블카 등으로 편하게 오를 수 있는 곳은 -이제는 취재 때문에라도- 가보았는데, 독일 등 주로 여행하던 나라에서 산에 올라가면 꼭 이런 십자가가 세워져 있더란 말이죠.

독일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도 그랬습니다. 어쩌다 하나 있는 게 아니라, 조금 과장을 보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알프스에서는 봉우리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스위스에서도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하구요.


지금처럼 헬리콥터로 실어나를 수도 없었을 테니 옛날에 이 십자가를 질질 끌고 등산해서 세웠다는 얘기잖아요.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낭만주의를 공부하다보니 이제서야 그 퍼즐이 풀리더군요. 대자연을 향한 동경, 즉 자연을 마치 하나의 신처럼 숭배하기에 산 위에 십자가를 세워 그 숭배의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러니까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종교국가라도 해도 될 정도로 기독교(개신교 또는 가톨릭)가 전 국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십자가가 자연을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종교적 행위가 일상화된 사람들이기에 종교적 메타포로 자연을 향한 동경을 표현한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산꼭대기의 십자가를 독일어로 기펠크로이츠(Gipfelkreuz; 직역하면 "봉우리의 십자가"라는 뜻)라고 부르고, 주로 낭만주의가 만개한 19세기에 많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왜 낭만주의가 여기에 깊은 연관이 있는고 하니,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자연을 동경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자연을 탐험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산을 넘으며 사냥이나 교역을 하던 사람들은 굳이 등산을 할 필요가 없었겠죠. 낭만주의 시대 이후 취미와 레저로서 등산을 하기 시작하니 산봉우리를 밟아봐야겠죠. 장비가 변변치 않던 시절이니 목숨을 거는 행위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탐험가"들이 늘어나면서 "여기는 내가 먼저 밟아봤다"는 이정표를 세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이것이 기펠크로이츠라는 하나의 문화를 만든 셈입니다.

기펠크로이츠가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산에서 발견되는 이유, 바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러니까 당시 신성로마제국에서 낭만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이름 난 산에 오를 때 이런 십자가가 보이거든 여기에 누군가의 무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 어떤 탐험가가 이 십자가를 낑낑 짊어지고 올라와 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찬양하는 의미로 세워두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탐험가들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펠크로이츠는 피뢰침 기능이 있어서 산에 벼락이 칠 때 탐험가의 목숨을 구해주는 효과도 있었다고 하네요. 당시만 해도 벼락에 맞아 사망하는 사례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니까요.


그리고 키펠크로이츠가 하나의 문화가 된 이후에는 이것도 경쟁적으로 크고 아름답게 세우려는 요상한 경쟁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제 생각에 평범한 여행자가 대중교통의 힘을 빌어 오를 수 있는 산봉우리에서 볼 수 있는 기펠크로이츠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이 녀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Zugspitze)에 있는 황금빛 십자가입니다. 철제 십자가에 도금까지 했습니다. 사실 지금 볼 수 있는 십자가는 현대에 들어 복원하여 헬리콥터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만, 1800년대 중반 이 자리에 처음 세워진 십자가는 사람들이 직접 지고 올라가 세웠었다고 하네요. 원래 있던 십자가는 현재 추크슈피체의 관문인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의 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처음 설치된 십자가는 여러번 벼락에 맞아 쓰러졌고, 설치 37년만에 30명 이상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해발 3천미터 가까이 되는 곳까지 수십명이 움직여 십자가 하나를 세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겠죠. 그냥 하나의 문화라고만 설명하기엔, 당시 낭만주의에 빠진 독일인에게 기펠크로이츠가 갖는 의미가 굉장히 컸다는 걸 엿볼 수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추크슈피체에 처음 기펠크로이츠를 세울 때 "바이에른 산의 왕자가 푸른 하늘에 머리를 드러냈다. 왕자에게 황금 관을 씌워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산은 곧 왕자이고, 황금빛 십자가는 왕자의 머리에 씌운 왕관입니다. 이게 낭만주의입니다.


해발 2,962m 높이의 추크슈피체까지는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교통권은 한국에서도 구매할 수 있어 편리합니다.

오늘날 더 이상 기펠크로이츠가 늘어날 일은 없습니다.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특정 종교의 상징물인 십자가를 공공장소인 산봉우리에 세우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또는 스위스를 여행하다가 산 위에서 십자가를 만나거든 200여년 전의 발자취라 생각하면 됩니다. 얼마나 이 산을, 이 자연을, 마치 신처럼 동경하고 찬양했었는지, 그 낭만적인 마음을 공유해보면 여행이 좀 더 재미있을 겁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