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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정보/아우크스부르크

Augsburg | Topic.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화의

신성 로마제국에서 황제는 껍데기뿐인 권력가였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각 지역에 분포된 선제후가 가지고 있었다. 선제후(選帝侯)라는 말 자체가 "선거권을 가진 제후"를 의미하는데, 이 선거가 황제를 뽑는 선거이다. 그러니까 선제후는 황제를 뽑을 권리가 있는 영주였고, 당연히 이들의 권력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들 선제후들이 모여 제국 내의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가 제국의회(Reichstag)이다. 제국의회는 제국도시를 순회하며 열렸는데, 아우크스부르크는 15~16세기 당시 독일에서 가장 번성했던 제국 도시로서 그 당시의 제국의회가 빈번하게 열렸던 도시이기도 하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바로 이 자리에서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이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정리하여 낭독한 것이다. 소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er Konfession)"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신교가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공표한 사건이며, 신앙고백의 내용이 비교적 온건하게 조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당성이 공표되자 더욱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555년 다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소집된 제국의회는 소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Augsburger Religionsfrieden)"라 부르는 결의를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것은, 신성 로마제국 내에서 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순간이다. 모든 영주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아 신교와 구교 중 하나를 택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영주에 속한 영민은 영주의 신앙을 따르며, 만약 이를 원치 않으면 다른 영지로 옮길 거주이전의 자유까지 보장받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영주에게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것이지만, 영민들 역시 영지를 옮길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 그 당시로서는, 게다가 신성 로마제국에서 카톨릭이 갖는 위상을 고려했을 때, 파격적인 결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덕분에 아우크스부르크는 독일 중세 역사에 중요한 장소로 오늘날까지 언급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참고로, 모든 일이 순리대로 해피엔딩으로 귀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인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건만 신성 로마제국의 종교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더욱 노골화되고, 결국 신교와 구교가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는 외세까지 끌어들여 독일 땅에서 기나긴 "30년 전쟁"을 벌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