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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EBS <난생처음 다크투어> #4. 베를린

EBS 다큐 <난생처음 다크투어>의 마지막 여행지는 베를린(Berlin)입니다. 제가 다크투어 in 베를린이라는 제목의 글로 한번 정리했듯이 베를린이야말로 다크투어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갈 곳이 정말 많아서 베를린만 한 편에 담기도 버거울 텐데 방송에서는 어떻게 다룰지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분단의 상처를 극복하고 현대적인 대도시로 거듭남은 물론, 아직도 혼돈과 무질서한 분위기가 남아서 예술가들이 터를 잡고 열심히 창작 활동에 여념이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곳에 기념비나 추모비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아무곳에서나 누군가를 "기억"하는 작업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죠. 그래서 베를린은 세상 어디에도 유사한 사례가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그 매력을 미리 알아차린 마니아들의 버킷리스트가 되었으며, 지금은 "제2의 뉴욕"이라 불리며 세계에서 모여드는 핫 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그런 베를린에서 어떤 다크투어 여행지를 골랐을까요? 처음 찾아간 곳은 베를린 지하세계(Berliner Unterwelten)입니다.

방송에서는 독일어 원어를 살려 베를린 운터벨트라고 소개합니다. 아래(Unter)의 세상(Welt)이니까 지하세계라고 하는 게 더 와닿지 않나 쓸데없는 사족을 붙입니다.

베를린 지하세계는 단순한 방공호가 아닙니다. 당시 베를린 면적의 90%에 달하는 규모로 지하에 또 하나의 도시를 만든 겁니다. 지하에서 음식을 조달하고(심지어 맥주도 만들고) 각 장소간 통신도 할 수 있는 등 모든 도시의 시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단, 이 장소는 비밀에 붙여졌다가 나중에 건물을 짓는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기 시작한 관계로, 베를린 전역에서 아주 일부만 발굴되어 공개되어 있습니다. 방송에 나온 장소는 전철역 게준트브루넨(Gesundbrunnen) 부근입니다.

나치가 만든 지하세계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동서독 분단 시절에도 동독 주민들이 탈출을 위해 땅굴을 팠습니다. 장벽에서 가까운 건물의 지하부터 굴을 파기 시작해 서독까지 넘어가는 거죠. 그런 땅굴의 일부도 발굴되어 공개 중입니다.


다음 장소는 베를린 장벽 기념관(Gedenkstätte Berliner Mauer)입니다.

베를린 다크투어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베를린 장벽이죠. 베를린 장벽 기념관은 1961년 동독이 최초로 장벽을 쌓기 시작한 베르나우어 거리 주변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일반 여행자의 시선에서 가장 베를린 장벽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곳도 여기입니다. 다만, 방송에서는 베를린 장벽 기념관을 거의 스치듯 보여주고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갈 곳도 많은데 국내에 유명한 곳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느껴지네요. (출연진의 옷이 바뀐 걸 보면, 그래도 베를린 장벽 기념관을 안 보여주기는 아쉬워서 다른 날 보강촬영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책과 글로 여러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저는 이 경험을 여러분도 공유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한때 총구를 겨누고 사람을 죽여가며 대립했던 베를린 장벽은 고작 한 걸음입니다. 장벽이 무너지고나서 보니 이렇게 별 것 아닌데 분단 시절에는 이 한 걸음을 못 가게 하려고 사람까지 죽여가며 대립했습니다. 나중에 한국도 통일이 되고 휴전선이 없어지면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뭐야, 이 한 걸음 때문에 그 난리였어?" 대립이 끝난 뒤 다시 보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는데, 대립이 진행중일 때에는 세상 진지하고 살벌했던 그 우스꽝스러운 감정을 꼭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 프로그램의 1화에 뮌헨이 나왔는데, 뮌헨 근교의 그 악명높은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가지 않았죠. 그걸 보면서 아마 베를린 근교의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KZ Sachsenhausen)를 가려나보다고 리뷰에 적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 왔네요. 베를린 근교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라는 도시에 있습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다녀온 분들은 적지 않을 겁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그랬지만, 기분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뭐에 얻어맞은듯 온 몸이 축 쳐져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런 강제수용소가 주는 감정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다하우를 방문한 다음해에 작센하우젠에 갔는데요. 한 번 겪어봤으니 이번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지만 또 한 번 심하게 얻어맞은 기분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런 곳입니다.

어떻게 만행을 저질렀는지 독일의 전문가가 설명해줍니다. 나치는 가스실을 만들 때에도 입구에 "샤워실"이라고 적고는 목욕하라고 들여보냈다고 하죠. 가만 보면 수감자를 학살할 때 죽이기 전까지는 숨기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무리 힘 없는 수감자들이라 해도 수만명이 이판사판으로 들고 일어나면 무장한 친위대도 이길 수 없다고 두려워했던 건 아닐까요?

나치 친위대는 그 와중에도 오락거리를 찾았답니다. 당시 수감자는 친위대를 만나면 모자를 벗어 인사해야 하는 규율이 있었는데, 모자를 빼앗아 중립지역(출입금지구역)에 던졌대요. 모자를 들고 경례하려면 모자를 주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출입이 금지된 중립지역에 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 규율을 어기게 되므로 바로 총살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죽여가며 오락거리로 삼았을 정도로 미쳐도 제대로 미쳐있었노라 이야기해줍니다.

특히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비극이 계속됩니다. 동독에 들어온 소련군이 이곳을 계속 수용소로 사용하면서 정치범 등을 계속 잡아들여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승자의 입장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들도 긴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동지를 잃고 분노한 상태였겠죠. 점령군이 되어 그 "화"를 마음껏 풀었기 때문에 소련이 저지른 만행도 어마어마합니다.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는 나치와 광기와 소련의 광기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로 수감되어 수용소에서 태어난 사람이 출연했습니다.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죽었고, 아기를 키울 수 없는 환경에서 주변의 도움으로 악착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 분한테 이 장소는 자신이 고향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끔찍한 현장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장소를 없애서는 안 되고, 보존하여 더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나쁜 역사일수록 감추지 말고 더 알려야 됩니다. 설령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더라도요. 역사를 대하는 독일의 철학을 이 출연자가 대변해준 것 같아 인상적이었습니다.


베를린에 이런 곳들이 있었나 싶으신 분들에게는, 이런 곳들을 열심히 취재해 미리 소개해둔 베를린 가이드북이 있다고 수줍게 광고합니다.


베를린의 마지막 장소는 슈타지 박물관입니다. 방송에서는 슈타지 감옥(Stasi-Gefängnis)으로 더 직접적인 명칭이 소개됩니다.

슈타지는 동독의 비밀경찰입니다. 소련의 KGB나 미국의 CIA 같은 정보기관이라고 해도 됩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의 독재정권 하에 있던 중앙정보부 같은 기관이라고 보면 됩니다. 표면적인 업무는 정보를 수집하고 방첩하는 수사기관이지만, 비밀스럽게 활동하며 막강한 힘을 가졌고 아무나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는 야만적인 곳이었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슈타지 박물관은 실제 슈타지가 사람을 잡아들여 수감한 감옥에 만든 박물관입니다. 옛 감옥의 모습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고문에 사용한 도구 등 슈타지의 만행을 고스란히 증언합니다.

악명 높은 "블랙박스"라는 이름의 독방을 비롯하여 슈타지가 어떻게 수감자를 고문하고 괴롭혔는지도 알려줍니다. 주로 정신적 고문들, 쉽게 말해 사람을 메말라 죽이는 악행들이 일부(어디까지나 일부) 소개되었습니다.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실제 피해자에게 "이런 곳을 보존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슈타지 감옥에서도 실제 수감되었던 피해자의 증언을 듣다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피해자는 똑같이 답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특히 젊은 세대들이 이 역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고요. 예전에 이런 만행이 있었고 누가 나쁜 놈이고 누구를 벌줘야 한다고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미래에는 다시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하고 보존하고 알려야 한다는 것이 독일의 기본적인 철학입니다.


이 출연자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멘트가 너무 주옥같아 전체를 소개합니다.

여러분도 민주주의는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나요? 이 세상에 공짜로 쟁취하는 건 없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누군가의 핏값으로 얻은 소중한 보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싸우고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알고 있나요?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그런 걸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았거든요. 지금이라도 알고 싶은데 이런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거의 남아있지 않잖아요.

<난생처음 다크투어>가 들려주는 독일의 다크투어리즘은 여기까지입니다.


여행 가서 예쁜 것만 보고 신나는 것만 즐겨도 시간이 부족할 판에 왜 어둡고 아픈 내용을 보아야 하는가, 이 방송은 그 대답을 똑부러지게 들려준 것 같습니다.


다크투어는 남의 역사를 알고 배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단순히 학습이 목적이라면 도서관에 가서 책으로 공부해야 됩니다. 다크투어는 남의 역사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 적용할 의미를 찾고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건 제가 이렇게 떠든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방송을 본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직접 보고 직접 생각하고 직접 느껴야 됩니다.


특히나 독일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한국의 역사와 공통분모가 많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고 통일을 밑천삼아 더 번영하였지만, 한국은 통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전쟁범죄를 사죄하였지만 한국은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받지 못했고, 그 범죄에 가담한 한국인들 또한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이 차이가 생긴 걸까요? 독일에서 다크투어를 직접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차이가 생긴 이유가 무엇인지 저마다 느끼는 지점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그 해답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사에서 유튜브에 무료로 전편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