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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독일뉴스

News |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빛과 그늘

2017년 독일 총선과 관련된 포스팅을 기회 되는대로 올리려고 한다. 이번에는 독일식 정당명부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독일 총선의 방식을 설명하면서 독일은 지역구 투표와 별도로 정당투표의 득표율에 따라 총 의석이 배분되는 방식이라 소개한바 있다. 지역구 당선자는 당연히 의원이 되는 것이고, 정당 득표율에 따라 총 의석이 배분되도록 비례대표 당선자를 결정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런 식이다. 각 정당은 각 지역별(1개 수도, 2개 자유도시, 13개 주, 총 16개 지역)로 비례대표 명부를 작성해 제출하며, 그 중 명단 1번의 대표자(Listenführer)의 이름과 정당명이 투표용지에 기록된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기민당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 지역의 비례대표자이고, 경쟁자였던 마르틴 슐츠는 사민당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의 비례대표자이다. 그런 식으로 각 지역별로 명망 높은 사람을 1번에 배정하여 투표용지에 이름을 넣고 투표를 유도한다(실제 투표용지를 보니 비례 5번까지는 이름이 기재되는 것 같았다). 지역구 출마자도 비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고, 지역구에서 떨어져도 비례로 당선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지역구 투표를 1차투표(Erststimme), 정당비례투표를 2차투표(Zweitestimme)라고 부른다. 1차투표에 따른 당선자는 299명으로 고정되고, 2차투표는 득표율에 따라 총의석이 결정되는 셈이기에 늘 당선자 수가 바뀐다. 최소 299명이라는 규정만 있다. 즉, 독일 하원은 총 598석이 정원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최소 598석이 정원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앞서 소개했듯 이번 총선으로 당선된 사람은 총 705명이다.


이렇듯 정원을 따로 두지 않고 국민이 뽑은 지역구 의원 전원과 국민의 원하는 비율의 정당 구성을 모두 충족하는 방식을 정당명부제라고 한다. 독일의 독특한 선거방식이며, 한국에서도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을 요구하는 정당이 있다.


얼핏 보면 합리적이다. 국민이 A 정당을 30% 지지했다면 국회에 A 정당의 의원이 30% 들어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위 그림은 각 지역구별로 당선자의 정당을 색깔로 구분한 것이다. 검정색이 기민당-기사당 연합(이하 "기민당"으로 통칭), 빨간색이 사민당, 하늘색이 AfD(독일을 위한 대안), 거의 보이지도 않는 보라색이 좌파당이다. 아예 보이지 않지만 중간에 녹색이 하나 끼어있고 이것은 녹색당이다.


보다시피 지역구 당선자의 절대다수는 기민당이 휩쓸었다. 의회 독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하지만 기민당은 원내 과반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극우정당인 AfD는 딸랑 3곳의 지역구 의원만 배출했지만 총 100명 가까운 의원을 배출해 원내 3당이 되었다. 심지어 지역구 의원이 단 한 명도 없는 자민당은 비례대표만으로 78명이 당선되어 원내 4당이 되었다.


정당명부제의 단점이자 한계가 이것이다. 비례의 비중이 너무 크다. 사실상 유권자는 그 지역의 비례명단 1번의 대표자만 보며 투표한다. 내가 특정 정당을 지지함으로써 누가 국회의원이 되는지 명확히 알고 투표해야 되는데, 명단에 누가 있는지 일일이 알아보지 못하고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오히려 민의가 왜곡되고 자질미달의 정치인이 원내에 입성하는 불상사까지 생긴다.


가령, 한국의 경우 거대정당도 비례 당선자가 20명 안팎이니 명단에서 10~20명만 확인하면 된다. 하지만 독일은 비례명단에서 정당별로 최소 수십명, 최대 100명 이상을 확인해야 하니 사실상 확인이 불가능하다. 정당은 인기인 몇 명을 앞세워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해 유권자를 선동하면 너무 쉽게 수십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이러한 정당명부제를 택하는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독일의 최고 권력자는 총리인데, 총리는 국민이 직접 뽑지 않고 하원의원의 투표로 뽑는다. 그러니 국민의 택한 비율대로 국회의원이 구성되어야 총리 선출에 국민의 의사가 반영된다. 즉, 실질적으로 2차투표는 총리 선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면 총리를 바로 뽑게 하면 되는데, 괜히 이상한 제도를 만들어 누구인지도 모르는 수백명의 국회의원을 뽑게 만든다.


독일은 최악의 독재를 경험했던 트라우마가 강하다. 국민이 권력자를 뽑으면 히틀러처럼 "말빨 센 놈"이 국민을 선동해 권력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경계심이 있기에 국민이 직접 선거로 권력자를 뽑지 않는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총리를 뽑게 하고, 대신 국회의원이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 총리를 뽑아서는 안 되니 국민이 원하는 비율로 국회의원을 구성하게 한다는 것이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따지고보면 조삼모사다. 그 부분을 굳이 비판하거나 비웃을 이유가 없으니 더 이상의 부연은 생략한다.)


한국은 국회의원이 권력자를 뽑지 않는다. 최고권력자는 국민의 투표로 직접 뽑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의 최고권력자 선거"인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한국에 도입할 이유는 없다. 그 제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 제도가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한국과 아예 다르기 때문이고, 그 제도의 부작용이 한국에서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고 민생의 발목을 잡을 우려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