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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233. 구야시와 굴라쉬, 육개장과 장조림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굴라쉬"라고 하면 저는 고기스튜를 먼저 떠올립니다. 비프굴라쉬(Beef goulash)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요리를 말하는 거죠. 소스와 함께 고기 덩어리를 넣고 자작하게 끓입니다. 소스가 얼마나 졸아드는지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니까 마치 장조림처럼 소스를 찍어먹을 정도만 남을 때까지 졸이든지, 수프처럼 소스를 떠먹을 정도는 남을 때까지 졸이든지, 그런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튼 굴라쉬라는 요리 하면 저는 이런 비주얼을 자연스럽게 떠올렸습니다.


아무래도 서양식 요리는 대개 미국을 통해 또는 일본을 거쳐 받아들였기 때문에 미국식 스타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굴라쉬가 헝가리의 전통음식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헝가리어로 구야시(Gulyás)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굴라쉬의 원조인 셈인데요. 구야시의 비주얼은 굴라쉬와 전혀 다릅니다.

구야시를 주문하면 이런 식으로 한 솥 가득 담겨 나옵니다. 소스를 자작하게 끓였다고 볼 수 없는, 수프처럼 떠먹는다고 보기도 어색한, 그냥 우리가 찌개 또는 국이라 부르는 그 비주얼로 나옵니다. 수프가 아니라 국물이고, 그것도 예사롭지 않은 빨간빛을 띕니다.

국물 깊숙히 뒤집어 보니 건더기가 풍성합니다. 고기, 감자, 채소를 깍뚝 설어 듬뿍 넣고 끓였습니다. 서두에 보여드렸던 굴라쉬와 같은 음식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다른 식당에서 주문한 구야시입니다. 반쯤 먹고 나서 한 번 찍어봤습니다. 국물에는 빨간 기름이 동동 떠 있습니다. 매울 것 같은데? 네, 맵습니다. 서양 요리가 매워봤자 아닌가? 아니요. 죽을 정도로 맵지는 않지만 분명히 고추의 매운 맛이 혀를 때립니다. 국물을 들이키면 "맵다"가 아니라 "얼큰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맛입니다.


고사리나 숙주가 없다뿐이지 그 맛은 육개장과 유사합니다. 그러니까 육개장 같은 구야시가 서양에서 개량되어 장조림 같은 굴라쉬로 전해진 셈입니다.

헝가리의 한 전통시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시장에서 주렁주렁 걸고 파는 "보편적인 식재료"에 이렇게 고추와 마늘이 걸려 있습니다. 고추와 마늘로 찌개를 끓였으니 구야시가 육개장 같은 얼큰한 맛을 내는 게 당연한 거죠.


참고로 헝가리에서는 이것을 고추라고 부르지는 않고 파프리카(헝가리어로는 퍼프리커)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파프리카 하면 피망처럼 생긴 둥글고 넓적한 채소를 떠올리는데, 헝가리의 파프리카는 둥글고 넓적한 것부터 고추처럼 가늘고 긴 것까지, 또는 청양고추처럼 작고 더 매운 것까지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평범한 한국인이라면 유럽에서 오래 여행할수록 그 느끼한 음식에 속이 니글거려 반사적으로 얼큰한 한국음식을 갈망하게 되는데요. 적어도 헝가리에서는 그런 염려가 필요 없습니다. 헝가리의 전통음식은 구야시에서 볼 수 있듯 얼큰한 요리가 많아 한국인의 입맛에 정말 잘 맞거든요.


얼큰한 게 땡기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구야시를 주문하면 됩니다. 구야시는 헝가리 음식의 출발점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아무 식당에서도 심지어 이탈리아 피자집 등 전혀 헝가리 음식과 관계없어보이는 곳에서도 판매합니다.


다만 구야시가 완벽하게 한식을 대체하지는 못하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밥은 없습니다. 밥 말아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얼큰한 국물을 먹으면서 밥 대신 빵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헝가리 전통음식에는 굴라쉬 같은 고기스튜는 없나요? 있습니다. 푀르쾰트(Pörkölt)가 바로 굴라쉬 스타일의 스튜 요리입니다. 비프굴라쉬에 해당되는 음식은 머르허푀르쾰트(Marhapörkölt)입니다.


구야시는 헝가리 민족의 유래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구야시처럼 한 솥에 재료를 다 때려넣고 끓이는 방식의 요리는 몽골 등 중앙아시아 기마민족에게서 발견됩니다. 샤브샤브가 몽골에서 유래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죠.


헝가리 역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 출신입니다. 마자르(헝가리어로 머저르)인이 유럽으로 진출해 땅을 점령해 국가를 선포하고, 이후 기독교로 개종해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국가로 승인을 받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마자르족의 침공이 마치 훈족의 침공처럼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훈족의 나라"라는 뜻의 헝가리라는 영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헝가리어로는 "머저르족의 나라"라는 뜻의 머저로르사그가 정식 국호입니다.)


기마민족 스타일의 국물요리는 기존 유럽인에게는 낯설었겠죠. 헝가리를 오랫동안 지배한 오스트리아, 그리고 당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와 한몸이었던 독일에서 구야시가 굴라쉬 스타일로 변형됩니다. 독일어로는 굴라슈(Gulasch)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도 굴라쉬는 매우 즐겨먹는 요리 중 하나입니다. 위 사진은 사슴고기 굴라쉬인데요. 장조림처럼 만드는 방식 자체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굴라쉬도 수프처럼 먹는 게 없는 건 아닙니다. 이런 경우는 굴라쉬수프(Gulaschsuppe)라고 별도로 부릅니다. 하지만 얼큰한 국물과는 거리가 먼, 고기맛 가득한 서양식 수프입니다. 위 사진의 빠네굴라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무튼, 사진으로만 보아도 구야시와 굴라쉬는 전혀 다른 요리죠. 수프와 스튜의 차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는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한식이 생각나지 않는 얼큰한 국물요리 구야시, 누가 봐도 딱 전형적인 서양 요리인 굴라쉬. 그래서 구야시는 헝가리에서 꼭 한 번은 먹어주어야 합니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즐기는 얼큰한 식도락 여행. <부다페스트 홀리데이>에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