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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076. 북방의 로마 고슬라르

하르츠 산맥에 있는 작은 도시 고슬라르(Goslar)의 별명은 "북방의 로마"입니다. 한국의 어느 도시가 스스로를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르는 것처럼 자기 혼자 주장하는 별명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알프스 이북에서 로마에 버금가는 강한 힘을 가진 도시가 나타나 사람들이 "북방의 로마"라고 불렀습니다.

고슬라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의 도시였습니다. 그는 고슬라르에 궁전을 짓고 머물렀는데요. 당시 교황청에서 교황직을 돈으로 사고팔기도 하고 2명의 교황이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다투기도 하는 등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하인리히 3세는 황제의 권한으로 교황을 파면해버리고 자기가 새 교황을 임명했습니다.


이후 교황이 죽고 새 교황을 정해야 하면 하인리히 3세가 차기 교황을 결정합니다. 교황청을 무릎꿇게 하고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그러면서 스스로를 "로마인의 왕"이라고 칭했던 하인리히 3세의 도시이기에 고슬라르는 "북방의 로마"가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때 굴욕을 경험한 교황청은 하인리히 3세가 죽고 아들 하인리히 4세가 황제가 되자 복수를 시작합니다. 아버지에 이어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하인리히 4세에 반발해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귀족들이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자 어쩔 수 없이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거처 앞에 3일간 무릎을 꿇고 파문을 취소해달라며 간청합니다.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죠. 이후 몇 차례 반전이 거듭되지만 어쨌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세속 권력(황제)이 종교 권력(교황) 밑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 지배질서가 향후 수세기동안 유럽을 지배하게 되죠.

그런 대단한 힘을 가진 도시이지만 이탈리아 로마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것은 아닙니다. 중세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펼쳐지는 예쁜 소도시이며, 좁은 골목 어디를 들여다보아도 수백년 전의 시가지가 나타나 하염없이 산책하게 만듭니다.

특히 마르크트 광장 중앙의 분수에 있는 황금색 독수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상징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이 독수리 문양이었거든요. 앙증맞은 시가지에 어울리는 앙증맞은 분수이지만 "북방의 로마"로서 유럽을 지배했던 과거의 영광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하고, 하인리히 4세가 황제에 무릎을 꿇고, 그렇게 권력이 쪼그라든 것이 11세기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고슬라르는 쇠락하였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이후에도 고슬라르는 쭉 부강한 도시로 번영하였습니다. 마르크트 광장의 한 건물에 있는 위 장식(금화를 배설하는 아이)은 "화폐주조권"을 상징합니다. 그만큼 제국 내에서 황제의 권력을 상실했어도 경제적 권력은 유지했다는 방증입니다.

무엇이 고슬라르를 계속 부유케 했는가, 바로 광산입니다. 인근 광산에 구리, 은, 납 등을 다양한 광물이 풍부했다고 합니다. 고슬라르의 람멜스베르크 광산은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린 1988년까지 가동되었습니다. 문헌상 기록된 첫 체굴은 968년. 무려 1000년 이상 가동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운영된 광산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이 추정하기로는 최소 3~4세기경부터 체굴이 시작되었을 것이며, 어쩌면 3000년도 더 되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슬라르의 구시가지 전체, 그리고 람멜스베르크 광산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리고 문 닫은 광산은 박물관으로 재단장하여 옛 광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교육의 현장이 되었고, 옛 광산의 시설을 직접 보며 체험할 수 있는 테마파크로도 개방되어 있습니다.

하인리히 3세의 궁전 카이저팔츠(Kaiserpfalz)도 남아있습니다. 교황청까지 굴복시킨 강력한 권력자의 궁전이라기에는 매우 소박하지만, 그만큼 실용적이고 중후한 멋이 있습니다. 내부에 하인리히 3세의 무덤이 있는데, 그가 매우 아꼈던 반려견도 함께 순장(?)되어 오늘날 황제의 무덤 옆에 기념되어 있습니다.


아담한 구시가지와 카이저팔츠 궁전까지 관광할 때 3~4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름 없는 골목까지도 하염없이 걷게 하므로 쉬엄쉬엄 반나절 정도 여행하고, 자녀를 동반한 여행자라면 하루 머물며 람멜스베르크까지 여행하면 좋습니다. 주변 큰 도시로는 하노버(Hannover)가 있으니, 하노버에 숙박하며 당일치기로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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