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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090. 독일 기차가 연착되었을 때

독일 기차는 뭔가 칼같이 정확하고 시간도 딱딱 맞출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연착이 빈번히 발생하는 편입니다. 단, 제가 독일 말고 다른 나라도 여행하는 회수가 늘어나면서 다른 나라 열차를 경험해보니 "그나마" 독일 기차가 가장 양호한 편이기는 하더군요. 아무튼,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양호하다는 것이지 연착이 없다(또는 적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 기차를 환승해야 하는데 앞선 열차의 연착으로 다음 열차를 타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 잘못이 없는데 기차를 못 탄 거잖아요. 당연히 최종 목적지까지의 이동은 독일철도청이 보장합니다. 다음에 도착하는 동일한 등급의 열차를 타고 갈 수 있습니다. 조기발권 할인운임으로 구매한 경우 지정된 열차만 탈 수 있는 게 원칙이지만 연착이 발생한 것이니 다른 열차를 타도 됩니다.


독일철도청의 공식 규정대로는 20분 이상 연착된 경우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동급의 모든 열차에 탑승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령, 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쾰른까지 가는 ICE 열차를 갈아타야 되는데 연착 때문에 이걸 놓쳤으면, 다음에 오는 쾰른행 ICE 열차를 타도 되고, 기다릴 수 없으면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 가는 ICE 열차를 타서 하여튼 쾰른까지만 가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임의로 스스로 판단해서 아무 열차나 타시라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일단 인포메이션에 가서 티켓을 보여주고, 연착으로 못 탔으니 다른 열차 타게 해달라고 요청하시면, 인포메이션 직원이 적절한 스케줄표를 뽑아서 이걸 타면 된다고 알려주고 티켓에 메모까지 해줄 겁니다.


20분 이상 연착에 대한 규정이 있으니 굳이 인포메이션 안 들러도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10년 넘게 독일을 여행하며 숱하게 기차를 타며 경험한 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독일인은 매우 보수적입니다. 또한 독일철도청은 공기업이나 마찬가지라서 직원들도 공무원 같은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책임지는 걸 싫어합니다. 책임지지 않으려니 더 보수적이 되고 융통성은 없죠.


20분 이상 연착되었다고 해서 임의로 다른 열차를 탔다고 가정합시다. 검표할 때 직원이 "당신 티켓은 이 열차를 탈 수 없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그러면 20분 이상 연착되었음을 이야기하고 규정을 들어 반박해야겠죠. "아, 그러냐, 알겠다"고 이야기할 검표원이 몇이나 될까요? "당신이 20분 이상 연착되었음을 증명하라"는 말을 하겠죠. 어떻게 증명할 건데요?


한국이었다면 "그걸 왜 내가 증명해" "당신이 본사에 전화해서 알아봐"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독일에서 그런 건 안 통합니다. 만약 고성을 지르고 따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검표원이 바로 경찰 부를 수 있습니다. 다음 역에서 경찰이 올라타서 끌고 갑니다. 컴플레인이 일상인 한국식 문화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독일이라는 나라는 이렇습니다.


정중하게 항의하더라도 결론은 이렇게 납니다. "난 모르겠고, 일단 벌금 내" "억울하면 나중에 본사에 편지 보내서 돌려받아" 공무원 성향이 강하다고 했죠? 십중팔구 이렇게 결론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20분 이상 연착되었음을 입증하는 건 나의 몫입니다. 또는 나중에라도 편지를 보내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 모험을 하나요? 그냥 인포메이션에 가서 확인만 받아두었으면 깔끔한데 그걸 일부러 피할 이유가 있을까요?

독일인 특유의 악필(?) 때문에 잘 안 보이실지도 모르겠지만, 이 티켓에 ICE70 +90min 이라는 메모가 적혔습니다. ICE70편이 90분 이상 연착되었다는 확인 도장입니다. 이런 확인을 받아두어야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독일어로 정중하게 항의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면 모르겠는데, 우리 같은 여행자가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그게 힘들잖아요. 귀찮더라도, 번거롭더라도, 확인 도장 꼭 받아두세요. 인포메이션에 갈 시간 여유가 없으면, 연착된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검표원 찾아서 그 사람에게라도 확인을 받아두셔야 합니다. 위 사진은 기차를 뒤져서 검표원을 찾아내 확인 도장 받은 겁니다.


독일에 오래 사신 분들은 20분 이상 연착 규정을 잘 알고 있어서 "확인 도장 안 받아도 된다" "인포메이션 안 가도 된다" "독일철도청 규정에 그렇게 써 있다"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말 잘 안 통하는 여행자가 공무원 성향의 독일철도청 직원을 상대할 때, 제 경험상 그렇지 않더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외국인이 소리 지르며 따지니까 경찰 불러서 끌어내린 걸 직접 보았습니다. 외국인이 항의하는데도 "난 몰라"라는 표정으로 무조건 안 된다는 말만 하니까 보다못한 옆좌석 독일인이 같이 항의해주어 결국 검표원이 물러선 것도 직접 보았습니다. 모두 서양인들이었으니 인종차별이라고는 하지 마시고. 말이 잘 안 통하면 이런 일은 숱하게 겪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