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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303. 아헨 대성당, 유럽의 아버지가 잠들다.

블로그를 통해 신성로마제국보다 더 오래 전 이야기로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 및 카롤링어 왕조와 관련된 글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카롤루스 대제가 오늘날 서유럽과 중앙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룰을 만든 "유럽의 아버지"이며, 그의 사후 손주들에게 의해 셋으로 나뉜 왕국이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3국뿐 아니라 사실상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서유럽 전체의 선조가 카롤루스 대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래서 카롤루스 대제의 "신전"은 유럽 전체의 성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바로 그 성지, 아헨 대성당(Aachener Dom)을 소개하는 시간입니다.

아헨 시청사는 오랜 옛날 카롤루스 대제의 궁전이 있던 자리입니다. 오늘날에도 시청사는 마치 낡은 고성을 보는듯 육중한 위용을 뽐내는데요. 실제로 옛 궁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궁전 앞에 서 있는 동상의 주인공이 카롤루스 대제입니다.


옛날에는 궁전 뒤로 건물이 더 연결되고 그 끝에 대제의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이 예배당에 안장되었습니다. "유럽의 아버지"가 잠든 곳인데 후손들에게는 그 상징성이 어마어마했겠죠. 이내 예배당은 거대한 성당으로 변신합니다. 이곳이 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아헨 대성당입니다.

아헨 대성당은 생긴 게 참 독특해요. 언뜻 고딕 양식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이 보이기는 하지만 무엇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독특한 건축미를 뽐냅니다. 중앙의 팔각형 돔이 카롤루스 대제의 예배당이고, 그 후에 주변에 성당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건축양식이 혼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마치 거대한 성탑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의 교회 건축과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특이합니다. 곧장 팔각형 예배당(원래 카롤루스 대제의 예배당)으로 연결되는데, 대리석을 황금빛으로 비추어 마치 신전에 들어온 것 같아요. 이런 부분에서는 비잔틴 양식도 발견되는데, 실제 카롤링어 왕조의 건축이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내부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중앙의 샹들리에입니다. 바르바로사 샹들리에(Barbarossaleuchter)라고 하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만들었습니다. 팔각형 예배당 모양에 맞추어 팔각형(곡선으로 되어 정확히 8각은 아님)으로 제작해 중앙 돔 아래에 설치했습니다. 샹들리에는 새 예루살렘 성벽을 모티브로 제작되었고, 48개의 촛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샹들리에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 가치가 높다고 하네요.

거기서 위를 올려다보면 중앙 돔 안쪽에 아름다운 장식이 보일 겁니다. 쿠펠모자이크(Kuppelmosaik; 영어로는 쿠폴라모자이크)라고 합니다.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언급되는 24명의 장로가 마지막 날 재림예수와 천사를 영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자이크로 만들었지만 회화를 보는듯 매우 섬세합니다.


돔 아래에서 고개를 바짝 올리고 위를 구경하다 다시 고개를 내리면 이제 정면의 제단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가장 앞에 있는 황금 장식은 약 1020년경에 제작된 팔라도로(Pala d'oro)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너머 유리관 속에 보관된 황금빛 함은 마리아슈라인(Marienschrein)입니다.

마리아슈라인에는 네 가지 귀한 아이템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허리에 둘렀던 옷, 아기예수가 썼던 포대기, 성모마리아의 옷, 세례요한이 참수당할 때 입은 옷이 담겨있다고 하네요. 물론 고증이 없던 시절에 종교 권력에 의해 전해진 것이므로 진위 여부를 확언할 수는 없으나, 진위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신앙심을 가진 순례자들이 어떤 상징을 찾아 주기적으로 참배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때문에 순례자들이 매7년마다 아헨 대성당에 참배하는 전통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가하면 제단의 가장 뒤편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유골함 카를슈라인(Karlsschrein)이 있습니다. 원래 카롤루스 대제는 궁전의 예배당(오늘날 아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을뿐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100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가 장지를 확인하여 대제의 시신을 발굴하였고, 약 200년 뒤 아름답게 장식된 황금빛 함 속에 유골을 안장하였습니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수백년간 신성로마제국의 새 황제가 선출되면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습니다. 모든 황제 중의 황제인 카롤루스 대제의 신전에서 새 황제가 왕관을 받아 정통성을 과시하는 목적이었겠죠.

새 황제는 대관식이 끝난 뒤 중앙의 왕좌에 앉았습니다. 바로 이 왕좌가 카롤루스 대제가 사용한 것이며, 카를스트론(Karlsthron), 즉 "카를(카롤루스)의 왕좌"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에서 공수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었고, 오늘날에는 예배당 상층부에 따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돔이 높고 압도적인 위압감을 주는 황금빛의 유물들 덕에 굉장히 크게 느껴지지만 사실 아헨 대성당 내부는 그리 큰 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대성당 못지않은 존재감을 심어주는 것은 오로지 카롤루스 대제의 상징성이 선사하는 카리스마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독일 전체를 통틀어도, 전문적인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단순히 여행자가 느끼는 시각적 쾌감에서 보아도, 아헨 대성당과 유사한 사례는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제가 유럽 전체를 다 가본 건 아니지만 유럽의 주요 대성당을 다 통틀어도 이와 유사한 곳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곳. 아헨 대성당은 꼭 가보아야 할 명소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