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역사 이야기를 쉽게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여행을 이야기하면서 그 나라의 역사에 무지하고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터라 오랫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중입니다. 딱히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라 저 혼자 이것저것 찾아보며 퍼즐을 맞춰가고 있는데요.
그 퍼즐 중 하나를 여기에 풀어놓습니다. 되게 재미없는 글이에요. 전공자의 전문적인 시각이 아니라 제가 혼자 터득해가는 과정인지라 혹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퍼즐이 맞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글을 올린다는 점도 함께 말씀드립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게르만족이 중앙유럽에 진출합니다. 게르만족은 단일민족이라 하기엔 정말 많은 분파가 존재하며, 각자 나라를 세우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혼란한 시대가 펼쳐지죠. 이게 5세기의 일입니다.
당시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프랑크족 역시 그들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481년 왕조가 시작된 프랑크 왕국입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프랑크 왕국은 소국이었으며, 그렇다 보니 왕권이 약해 지방 영주의 권한이 강했습니다. 어쨌든 프랑크 왕국은 라인강 동편의 게르만족 분파인 알레마니족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오늘날 독일을 프랑스어로 알레망(Allemagne)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751년, 프랑크 왕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새 왕조가 시작됩니다. 대개 이렇게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정통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기에 새 국왕 피핀 3세는 교황에게 군대를 보내 지켜주는 조건으로 교황에게 정식 국왕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 피핀 3세의 아들이 새 국왕이 되면서 프랑크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특히 동쪽으로 무수한 영토전쟁을 벌여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 이 국왕이 바로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Charlemagne), 독일에서는 카를대제(Karl der Große)라 부르고 있고,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줄 수 없으니 일반적으로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카롤루스 대제(또는 카롤루스 마그누스)라고 부릅니다.
또한 단순히 영토만 넓힌 게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던 민족을 지배하며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서유럽 전체가 통일된 정체체계를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각 부족의 전통을 존중하되 중앙에서 관할하여 봉건제가 발전하는 토양을 만듭니다. 즉, 멸망한 로마제국 이후 오늘날 유럽의 질서를 새로 쓴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유럽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카롤루스 대제의 수도는 아헨(Aachen). 오늘날 아헨 대성당에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는 동쪽의 무시무시한 작센족마저 굴복시키고 왕국을 넓혔으나 끝내 이베리아 반도는 먹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유럽과 차별되는 문화를 가지게 되었구요.
그런데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뒤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의 왕조를 카롤링어 왕조라 부르는데, 그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루트비히 2세의 세 아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왕위를 상속받지 못한 둘째와 셋째 아들이 손을 잡고 첫째와 전쟁을 벌여 승리합니다. 결국 세 형제는 왕국을 셋으로 나누기로 합의하였으니 이것이 베르됭 조약입니다.
베르됭 조약은 그 이름대로 베르됭에서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모든 합의가 사전에 이루어진 곳은 독일 코블렌츠(Koblenz)의 성 카스토어 교회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나뉩니다. 각각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나뉘었습니다. 사실상 장남은 권력싸움에서 패한 거잖아요. 가장 불리한 합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한 정통성 있는 왕인 건 사실이기에 장남 로타르 1세의 땅 중프랑크에 카롤루스 대제의 수도 아헨, 교황의 도시 로마가 모두 포함됩니다. 명분은 챙긴 셈이죠.
그리고 막내 카를 2세(대머리왕 카를)가 서프랑크를, 둘째 독일왕 루트비히가 동프랑크를 갖게 됩니다. 서,중,동프랑크의 경계는 아래와 같습니다.
지도만 보면 오늘날 유럽의 국경과 매치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제가 주요 도시는 한글로 표시해두었습니다.
중프랑크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지역은 넓지만 북쪽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 끼어있는 아주 좁은 형태가 되었죠. 이 부분의 힘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로타르 1세마저 사망하고 난 뒤 이 부분은 반씩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 귀속됩니다. 이 부분의 중앙, 그러니까 아헨과 트리어를 잇는 곳에 선을 그으면 이게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이 됩니다.
결국 서프랑크는 오늘날 프랑스, 중프랑크는 오늘날 이탈리아, 동프랑크는 오늘날 독일의 기원이 되는 셈이구요.
서프랑크는 이베리아 반도 말고는 사실 더 영토를 넓힐 곳이 없죠. 이미 왕국이 완성단계이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프랑크는 사정이 다릅니다. 동프랑크는 대륙 동쪽의 이민족의 침입에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대표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한 유목민족 머저르(마자르)족이 있죠. 이들이 파죽지세로 유럽을 침공할 때 간신히 막아선 것이 동프랑크 왕국, 그 중에서도 작센족입니다. 그래서 머저르족이 더 들어오지 못하고 동프랑크 바깥쪽에 자리를 잡았으니 이게 오늘날 헝가리입니다.
동프랑크는 대부분 카롤루스 대제가 영토를 넓힌 지역입니다. 즉, 원래의 게르만족이 따로 있으며, 그중 특히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 프랑켄족의 세력이 컸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프랑크 왕국 역시 왕조의 대가 끊어지고, 선거로 선출된 새 국왕 하인리히 1세가 들어서게 됩니다. 그는 작센 출신입니다. 다시 말해, 이때부터 동프랑크는 프랑크 왕국의 오리지널 카롤링어 왕조와는 단절됩니다.
하인리히 1세의 수도는 크베들린부르크(Quedlinburg). 오늘날에도 성이 남아있습니다(물론 후대에 복원하며 변형되었습니다).
하인리히 1세는 국가를 독일 왕국이라 칭했습니다. 그래서 하인리히 1세를 "첫 번째 독일 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로서 프랑크 왕국의 정통을 계승하는 서프랑크가 프랑스가 되고, 대륙 중앙의 영토를 다 빼앗긴 채 교황이 머무는 반도에 눌러앉게 된 중프랑크가 이탈리아가 되고, 프랑크 왕국의 왕조와 단절되고 새로운 왕조를 열고 새로운 질서를 쓴 동프랑크가 독일이 되는 기틀이 마련됩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 오토 1세는 본격적으로 동방 진출을 목표로 삼고 마그데부르크로 수도를 옮깁니다. 그의 권력은 매우 강했습니다. 슬라브족을 정복하고 여기저기 영토를 확장하며 기독교를 전파합니다. 이탈리아까지 진출합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습니다. 여기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오토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입니다.
그러나 잦은 영토전쟁을 벌이려면 필연적으로 군사와 식량을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지방 영주의 협조를 받아야 합니다. 지방 영주의 권한이 최대한 존중되는 봉건제가 더 강화되었고, 애당초 동프랑크 자체가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 프랑켄 등 여러 부족의 연합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지역색이 뚜렷할 수밖에 없죠.
이후 신성로마제국이 출범하고서도 각 지역별로 권력을 가진 군주가 존재했고, 이들이 그 지역에선 황제보다 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 황제도 제후들이 모여 선거로 임명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독일이 지방마다 고유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고, 중앙 정부보다 지방 정부의 권한이 강한 지방분권국이 된 토대입니다. 독일은 이미 10세기부터 그렇게 살아왔던 겁니다.
더 이야기하자면,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 등 훨씬 깊이 들어갈 여지가 있는데, 우선 이 글에서는 여기까지만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되었지만 프랑스는 영토를 넓힐 대상이 없었기에 지방 영주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해줄 필요가 없었으나 독일은 그 반대였던 것, 프랑스는 민족적으로도 프랑크 왕국의 정통을 계승하지만 독일은 그 계승이 단절되고 점령지역의 게르만족의 연합으로 발전했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이 완전히 상반되는 문화적 특성을 갖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켜줄 힘과 의지가 있는 이에게 기대야 했던 교황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아 로마의 이름을 이어받아 신성로마제국이 된 것이 독일입니다. "유럽의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 이후 굉장히 복잡하고 골치 아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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