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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독일뉴스

News | 독일의 "나치 문양 맥주"에 대하여

며칠 전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보도된 내용이다. 독일의 한 마트에서 판매된 맥주에 나치의 문양이 들어있어 발칵 뒤집혔다는 내용. 독일 당국은 즉각 위법 여부를 조사하기로 하였고, 해당 맥주가 판매된 마트의 프랜차이즈 체인에서는 자신들과 무관한 지역 가맹점의 독단적인 판매라며 즉각 가맹계약을 해지한다는 것까지 보도되었다.


이 뉴스를 보면서 아직 국내 언론에서조차 나치 문양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것 같고, 그로 인해 댓글은 더욱 혼란스러운 것 같아 한 번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이것은 소위 나치 맥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치의 문양에 대해 국내에 떠도는 어떤 주장(내지는 풍문)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것이 문제의 나치 맥주다. 정식 명칭은 도이체스 라이히브로이(Deutsches Reichsbräu). 독일제국 양조장이라는 뜻인데, 당연히 여기서 독일제국이라 함은 히틀러가 꿈꾸었던 독일제국(제3제국)을 말한다. 그리고 맥주의 한 박스(Kasten) 가격이 18.88유로인데, 이것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이니셜인 A와 H가 각각 알파벳 1번째, 8번째 글자인 것에서 착안해 AH가 18, 하일 히틀러(Heil Hitler)의 이니셜 HH가 88이 되어 18,88유로가 된 것이다.


구 동독 지역인 바트 비브라(Bad Bibra)라고 하는 작은 마을의 극우 정치인이 만들어 판매한 것이라고 한다. 명백히 나치를 추종하는 극우적인 "굿즈"가 맞다. 그래서 독일이 뒤집힌 것이고.


그런데 독일은 전후부터 나치 문양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한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 맥주도 불법 아닌가? 이런 부분에 대한 국내 언론의 설명은 사실상 전무하다.


법으로 금지된 것은 소위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라고 하는 뒤집힌 卍자 모양의 문양이다. 위 사진에서 보듯 여기서는 하켄크로이츠가 사용되지 않았으니 불법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나치의 상징. 그런데 독수리는 그대로 두고 하켄크로이츠만 다른 문양으로 교체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켄크로이츠가 있는 자리를 대체한 것이 소위 철십자(Eisernes Kreuz)라 부르는 곡선 십자가 모양이다.


철십자는 독일 국방군의 상징 문양이다. 물론 2차대전 동안에도 나치 독일군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지금 독일군도 철십자를 사용한다. 나치가 사용했던 철십자를 현대 독일군이 사용한다고? 하켄크로이츠는 금지하면서 철십자는 놔둔다고? 언뜻 이상하다.

원래 철십자는 프로이센 시절부터 군대의 상징이었으며,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훈장에 사용되는 문양이었다. 즉, 군대 깃발이나 전투기에 그리는 게 아니라 군인이 훈장을 받을 때나 사용되는 문양이라는 것. 그리고 위 사진에서 보듯 나치 독일은 철십자에도 하켄크로이츠를 넣었다. 오늘날 사용되는 철십자에는 당연히 하켄크로이츠가 없으므로 나치가 사용한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네티즌과 가짜 전문가가 이런 말을 한다. 일본의 욱일기(전범기)와 똑같은 것은 하켄크로이츠가 아니라 철십자라고. 그래서 독일이 철십자 사용을 금지하지 않듯 일본이 욱일기 사용을 금지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고. 욱일기도 철십자처럼 2차대전 이전부터 사용한 일본군의 상징일뿐이니 지금도 사용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괴소리다.


나치 독일군은 철십자를 달고 침략전쟁과 학살을 벌이지 않았다. 나치군은 하켄크로이츠를 달고 전쟁을 벌였고, 나치에 세뇌된 독일인은 하켄크로이츠를 흔들며 히틀러를 찬양하였다. 철십자가 아니다. 하켄크로이츠 사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이 문양을 달고 침략한 군대에 짓밟히고 학살당한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또한 지금 독일군이 철십자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침략전쟁의 상징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나치가 사용하던 철십자와는 다르기 때문.


하지만 일본은 욱일기를 달고 침략전쟁과 학살을 벌였고, 당시 사용한 욱일기와 똑같은 문양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욱일기를 달고 침략한 군대에 짓밟히고 학살당한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반인간적인 폐륜이다.


나아가 철십자는 군대의 훈장 용도로만 사용되므로 일반인은 구경할 일도 없다. 그러나 욱일기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된다. 어느모로 보나 철십자와 욱일기는 카테고리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십자와 욱일기를 동일시하면서 욱일기 사용을 합리화하고, 하켄크로이츠와 욱일기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혹 앞으로 이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볍게 무시하시기를.


다시 뉴스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치 맥주"는 어떻게 될까? 현실적으로 처벌할 근거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철십자 사용은 불법이 아니고, 18.88이라는 숫자는 그냥 붙인 거지 히틀러를 찬양할 의도가 없었다고 우기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어느 시골 구석 마트에서 판매된 맥주도 이렇게 이슈가 되고 전국적으로 발칵 뒤집히는 걸 보면 역시 독일은 나치 시대의 과오에 대해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는 게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이 배워야 하는 것은, 욱일기를 사용하느냐 마느냐 같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과거사에 사죄할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아주 근본적인 출발점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