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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037. 바르트 성, 독일을 잉태한 땅

이 글은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독일의 여행지를 이야기하는 <유피디의 독일의 발견>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외국인의 대한민국 첫 여행기를 다루는 한 예능프로는 국내에도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을 처음 여행하는 외국인이 저마다 한국을 공부하여 계획을 세우는데, 특히 서대문 형무소나 전쟁 박물관 등 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며 많은 한국인이 박수를 보냈죠.


개인적으로도 이러한 여행 습관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러면 우리도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그 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찾아가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건 바람직한 여행 방법 아닐까요?


독일에서 그런 장소를 딱 하나만 고르라면 바로 여기, 바르트 성(Wartburg)입니다. 적어도 바르트 성을 논하지 않으면서 독일 여행을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바르트 성은 독일 중부 아이제나흐(Eisenach)에 있습니다. 해발 410m 높이의 산 위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죠. 흔히 독일에서 노이슈반슈타인 성 등 동화에 나올법한 고성들을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바르트 성처럼 전쟁 영화나 게임에 나올법한 "진짜" 고성도 독일 곳곳에 참 많습니다.

뻥 뚫린 전망 위로 대포가 놓여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걸 보더라도, 바르트 성은 영토전쟁이 횡횡하던 중세 시대에 군사적 목적을 겸하여 만든 "진짜" 고성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체 왜 바르트 성이 독일 역사의 중요한 무대일까요?


그 이유는 무려 세 가지나 됩니다.


첫째, 아직 독일의 문자와 언어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던 시절, 독일인(정확히는 게르만족)의 건국신화 등 중요한 이야기는 구전되어 계승되었겠죠. 그나마 게르만족의 민족적인 신화가 훼손되지 않고 전래될 수 있었던 것에는 13세기경 독일에서 크게 유행했던 쟁어크리크(Sängerkrieg)의 공이 큽니다. 노래하는 사람(싱어; Sänger)이 전쟁(Krieg), 다시 말해 노래하는 사람들의 경연대회 같은 건데요. 당시의 노래라고 하면 음유시인들이 약간의 음율에 얹어 구전 신화를 이야기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바르트 성에서 쟁어크리크가 계속 열렸어요. 즉, 바르트 성은 독일 민족주의의 뿌리가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둘째,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교황청으로부터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은 뒤 후원자의 도움으로 신분을 감추고 바르트 성에 은둔합니다. 그는 바르트 성의 골방에 틀어박혀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이것이 현대 독일어가 처음 체계를 갖추고 완성된 순간으로 평가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단지 특정 종교의 사건이 아니라 교황청이 지배하던 유럽 권력의 패러다임을 뒤바꾸고 르네상스를 촉발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바르트 성은 그 엄청난 사건의 핵심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후 바르트 성은 30년 전쟁 중 크게 훼손되어 오랫동안 방치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일 민족주의"와 "절대 권력의 붕괴"라는 상징을 가진 곳이기에 독일인에게 매우 잘 알려진 장소였죠. 대문호 괴테도 바르트 성의 재건을 제안하기도 했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사건입니다.


셋째, 나폴레옹의 유럽 침공으로 독일도 거의 전국이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었고 수백년간 존재했던 신성로마제국은 붕괴합니다. 나폴레옹 침공은 독일인을 각성하게 만들었죠. 우리도 강한 나라가 필요하다, 게르만족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 공감대는 통일된 독일을 원하게 만듭니다. 1848년 독일 혁명 등 1800년대 초중반에 그러한 에너지가 폭발하는데,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등 급진적인 대학생 단체는 바르트 성 앞에 모여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항쟁을 벌이게 되죠. 이들이 집회를 열 때마다 무수한 깃발이 흩날리는데, 한 단체가 흑색-적색-금색 3색기를 흔든 것이 오늘날 독일 국기의 유래입니다. 1919년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할 때 이 삼색기를 채택하였고, 그게 오늘날 독일의 국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바르트 성은 게르만 민족주의를 지켜주었고, 독일어의 체계가 완성되었으며, 독일의 통일과 민주공화국 출범을 요구한 시대정신이 모였던 곳입니다. 말하자면, "독일을 잉태한 땅"입니다. 독일 전체 역사를 통틀어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의 자태도 품격이 넘치니 일부러 찾아가 관광을 할만한 가치도 충분합니다. 여담이지만, 게르만 민족주의에 지독하게 심취했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바르트 성의 쟁어크리크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호이저>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탄호이저>에 매료된 어떤 군주는 그 오페라 속의 모습을 상상하며 성을 건축했으니, 그 군주가 루트비히 2세이고 그 성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입니다. 즉, 그 아름다운 "디즈니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실제 모티브가 바르트 성이기도 한 것입니다.

루터가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골방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루터가 사용한 책걸상, 난로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루터의 방(Lutherstube)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인에게는 매우 특별한 성지순례 장소이기도 합니다. 꼭 개신교인이 아니더라도 이 작은 방에서 독일어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시면 특별한 의미를 느낄 수 있겠지요.

유일한 단점은, 찾아가기가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뮌헨 등 여행자가 많이 찾는 도시와 거리가 있어요. 물론 아이제나흐가 있는 튀링엔 지역은 에르푸르트, 바이마르 등 그 자체로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 얼마든지 알찬 여행을 만들 수는 있지만, 프랑크푸르트 등 잘 알려진 대도시에서 연계하여 일정을 짜기가 쉽지는 않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그리고 위 사진처럼 밤에는 조명도 예쁘장하게 밝히는데, 저는 바르트 성에 몇 번 가봤지만 한 번도 야경을 보지는 못했어요. 성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시내버스를 타는 것, 걸어가는 것. 그런데 밤에는 버스가 없어요. 야경을 보려면 가로등도 없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야 되니 차마 가 볼 엄두가 안 나더군요. 이처럼 아주 편하게 갈 수는 없다는 것, 그게 바르트 성의 유일한 단점입니다.


내부 관람은 크게 두 코스로 나뉩니다. 쟁어크리크가 열렸던 공연장(오늘날에도 공연이 열립니다) 등 성의 곳곳을 가이드의 인솔 하에 보는 코스, 성의 역사와 종교개혁에 대한 자료들과 루터의 방을 자유롭게 구경하는 코스. 유료 입장을 하지 않아도 성의 안뜰까지 들어갈 수 있고 아름다운 성채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