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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185. 슈베베반, 명물과 흉물 사이

독일여행 책만 5권을 썼습니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다녀본 독일의 도시 중에 이 5권에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곳이 있던가? 전국 가이드북, 시티 가이드북, 테마 가이드북, 에세이까지 종류별로 다 썼는데도 제가 그 어디에도 넣을 연결고리를 찾지 못해 책으로 소개하지 못한 곳이 있던가?


몇 곳 있더군요. 그 중 하나, 부퍼탈(Wuppertal) 이야기입니다. 부퍼탈의 명물 슈베베반(Schwebebahn)을 소재로 하여 예전에 썼던 에세이가 있습니다. 이런 에세이들이 <유피디의 독일의 발견>으로 출간되었는데, 책에 넣지 못한 슈베베반 에세이를 당시 썼던 원문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그래서 이하 에세이 본문은 반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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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에서 멀지 않은 공업도시 부퍼탈에는 특별한 명물이 있다. 도시를 흐르는 강 위에 놓인 모노레일, 슈베베반(Schwebebahn)이다. 1901년 개설된 슈베베반은 여전히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며 시민의 발이 되고 있다. 지하철, 트램 등 보다 진보한 대중교통을 만들 기술력이나 자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슈베베반은 오늘날까지도 부퍼탈의 시민을 실어 나른다.


도시의 창조자

원래 부퍼탈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이 지역에는 여러 소도시가 부퍼 강(Wupper River)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부근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늘어났고(아스피린이 탄생한 곳도 여기다), 자연스럽게 교통난이 발생했다. 그래서 이 소도시들이 머리를 모아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슈베베반이었다.

슈베베반은 부퍼 강을 따라 건설되었다. 강 위에 철골 구조물을 세우고 모노레일이 그 위를 오가게 한 것이다. 건물과 도로가 없는 강 위로 다니는 대중교통이기에 교통난을 해소하기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슈베베반으로 연결된 여러 도시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문화권이 되었고, 결국 1928년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기에 이른다. "부퍼 강의 계곡"이라는 뜻의 부퍼탈은 통합 도시의 이름으로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삭막한 첫인상

부퍼탈을 찾았다. 당연히 내가 보고 싶은 0순위는 슈베베반이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하필 그 날 슈베베반은 공사로 인해 운행을 중단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슈베베반의 흔적을 쫓는다. 강 위에 놓인 모노레일 철로는 매우 육중하다. 마침 날씨가 잔뜩 찌푸려서 그런지 몰라도 그 모습이 몹시 삭막하고 위압적이다. 슈베베반 철로만 떼어놓고 본다면 오래 된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중앙역 부근의 시가지는 부퍼탈이 통합되기 전 존재했던 소도시 중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엘버펠트(Elbefeld)의 시가지다. 1900년대 초반 갑자기 도시가 성장하면서 커다란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섰고 여전히 그 모습이 남아있다. 엘버펠트 시청사(Elberfelder Rathaus)가 대표적인 장소. 하지만 마침 보수공사 중으로 볼썽사나운 가림막이 뒤덮고 있다. 가뜩이나 삭막한 부퍼탈의 첫인상을 더욱 굳혀주는 순간이다.


슈베베반과의 만남

나름 기대했지만 삭막한 기분만 안고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부퍼탈을 찾았다. 그것은 순전히 슈베베반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100년을 상회하는 긴 역사를 가진 모노레일을 꼭 보고 싶었다. 다시 부퍼탈 중앙역에 내려 시가지로 나섰다. 머리 위로 바삐 오가는 슈베베반이 보인다.

당연히 따질 것 없이 슈베베반에 올랐다. 공중에 매달려 운행하는 모노레일이라는 점만 차치하면 슈베베반은 평범한 지하철과 같다. 겉은 오색찬란한 광고로 도배되었고, 정해진 시간표대로 운행하며 시민의 발이 되어주고 있다.

내부도 평범하다. 자리가 있으면 앉고 없으면 서서 가는 영락없는 대중교통이다. 이미 오랜 세월동안 닳고 닳은 듯 창문에 낙서와 스크래치가 가득하다. 전망도 기대하기 힘들다. 옆으로 보이는 풍경은 순식간에 스쳐지나가고 철제 기둥 때문에 어차피 전망이 별로다. 결국 가장 뒷좌석의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부퍼 강과 모노레일 철골이 실질적인 전망의 전부다. 똑같은 간격으로 계속 이어지는 철골을 보며 더 이상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내 흥미가 떨어지고 만다.


전통에 대한 예의

1900년대 초, 신기술이 쏟아지고 "신기한" 문물이 거리를 뒤덮던 시절, 슈베베반은 그런 신기술의 하나로서 세상에 공개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훨씬 더 진보한 기술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지만 부퍼탈은 그 역사를 훼손하지 않으며 슈베베반을 유지하고 있다. 오래 전의 기술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여전히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교통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케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 기술은 쏟아지지만 그에 걸맞은 입체적인 기획력과 표현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던 시절, 그래서 슈베베반은 미적 가치가 무시되고 철저히 실용성에 바탕을 둔 모습으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 강 위에 줄 지어 있는 철골 구조물은 한 눈에 보아도 정말 튼튼하고 견고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눈길을 고정시킬 곳 없는 삭막하고 황량한 모습을 연출한다.

전통을 중시하는 독일답게 슈베베반은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한 채 공중을 오가고 있다. 이제는 유명세를 떨치며 나 같은 여행자를 관광도시가 아닌 산업도시 부퍼탈로 이끄는 명물이 되었다. 하지만 도저히 미적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슈베베반의 모습은 차라리 흉물에 가깝다는 인상마저 받는다.


독일의 기술력으로 슈베베반을 개량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슈베베반이 단순한 대중교통인가? 통합도시 부퍼탈의 탄생을 이끈, 다시 말해 부퍼탈의 대동맥이 되는 특별한 명물이다. 비록 그 모습이 흉물스럽더라도 부퍼탈이 슈베베반을 뜯어고치지 않는 것은 전통에 대한 예의인 셈이다.

명물이지만 흉물이고, 흉물이지만 명물이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배경삼아 쉴 새 없이 오가는 슈베베반에 이내 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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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벌써 5년 전에 쓴 글이네요. 이런 류의 에세이 중 고르고 골라서 49개의 에피소드를 추려 만든 책이 <유피디의 독일의 발견>입니다.

그러면 왜 부퍼탈은 책에서 빠졌는고 하니, 너무 사진이 우중충해서 제가 도저히 이 사진들을 책에 넣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대신 그 우중충한 느낌은 이렇게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