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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344. 부다페스트, 베를린, 기억

예전에 네이버포스트에 쓴 부다페스트 스케치라는 글에서 조금 더 부연되는 이야기입니다.

부다페스트를 여행하다보면 어떤 부분은 프라하를, 어떤 부분은 런던을, 어떤 부분은 빈(비엔나)을 떠올리게 하는 등 굴지의 대도시에 견줄 아름다운 매력이 많습니다. <부다페스트 홀리데이>를 만들기 위해 부다페스트의 구석구석을 참 많이 다녔는데요.

그런데 저는 그 중에서도 베를린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들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곳곳에 기념비가 참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헝가리가 공산주의 국가였기에 소련과 공산정권에서 체제 홍보를 위한 기념물을 여기저기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베를린과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데올로기 홍보가 아니라 정말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며 기억하는 기념비도 곳곳에 보입니다.

총탄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이곳, 국회의사당 앞마당 지하에 있는 1956혁명기념관입니다. 공산국가 시절 자유를 외치며 들고 일어난 혁명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죠. 혁명은 소련의 진압으로 결국 실패했습니다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들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던 당시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혁명의 지도자였던 너지 임레는 오늘날에도 국가의 위인으로 칭송받습니다. 위 사진은 너지 임레 동상인데, 딱히 펜스가 없는 관계로 사람들이 구름다리 위에 올라가 너지 임레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곤 합니다. 단, 울퉁불퉁한 바닥이 매우 미끄러워 주의가 필요합니다.

1956혁명 기념비도 따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얇은 기둥이 점점 하나로 모여 뾰족하게 뚫고 나오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따로따로 보면 힘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로 뭉쳐 부조리를 뚫고 저항했음을 은유합니다.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곳곳에 기념비가 많이 보입니다. 대체 이건 뭔지 한 번 더 찾아보게 만들고, 그러면서 헝가리와 관계가 없는 저같은 사람도 헝가리 역사의 한토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원본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헝가리의 나토 가입을 축하하며 베를린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립니다. 그만큼 부다페스트에 역사적인 기념물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까지 발견됩니다.

서버드샤그 광장에 있는 기념비입니다. 손에 십자가가 달린 무언가를 들고 있는 여신을 독수리가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슈트반의 왕관을 든 여신은 헝가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독수리는 나치독일을 상징합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헝가리를 점령하며 상처를 준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기념비 앞에 이렇게 어지럽게 널려 있는 대자보가 보입니다. 일부는 영어로 써놓아서 저도 읽을 수 있었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 등의 폭력을 자행한 것은 침략자 독일인이 아니라 헝가리인 지도부였다며, 모든 책임을 독일에 떠넘겨서는 안 되고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호소문을 붙여둔 것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일제강점기의 폭력에 대해 침략자인 일제만 욕할 것이 아니라 일본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호소문인 셈입니다.


이런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부다페스트는 곳곳에 역사적인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이러한 기념물의 목적은딱 하나, 즉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똑히 기억해야 하고, 그 사건을 겪지 않았던 후손에게도 올바른 진실을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집요할 정도로 도시 곳곳에 기념물을 만드는 것은 역시 베를린이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해야겠죠. 이들은 특히 피해자로서의 역사뿐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역사까지도 빠짐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 존경스럽습니다.


학생들 모아놓고 역사 교육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학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이렇게 역사의 단면을 마주하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복하여 접하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역사의 모든 순간은 그것을 감추고 싶어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추고 싶어하는 자가 권력을 잡으면 그 역사를 왜곡하거나 은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몇십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없어질수록 왜곡된 역사를 진실처럼 호도하며 더욱 뻔뻔해지기도 합니다.


기념물이 많은 도시는 기억을 대물림합니다.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겠지요. 그게 건강한 사회입니다. 기억을 훼방하는 사회, 기념물 하나 만들 때에도 논란이 생기는 사회, 대놓고 진실을 왜곡하면서 자유 운운하는 사회, 결단코 건강하지 못한 병든 사회입니다.


대한민국은 건강한 사회인가요? 자유라는 명분에 숨어서 역사를 왜곡하고 기억을 훼방놓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은 "기억"이라는 화두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날입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