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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352. 베를린과 비엔나의 광장 하나

베를린과 비엔나의 신호등을 소개해드렸는데요. 같은 독일어권 국가이지만 역사적으로 참 복잡하게 엇갈려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수도라는 점에서 베를린과 비엔나는 여러모로 공통점 또는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이번에는 베를린과 비엔나의 광장 하나씩 소환할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두 나라의 차이점을 이야기해볼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복잡한 역사를 간단히 정의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이 글은 필연적으로 단면을 전체로 확대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해석될 수 있구나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보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기 베를린과 비엔나의 상징적인 군주가 있습니다.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비엔나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Maria Theresia)의 거대한 동상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의 국왕이었고, 프로이센의 수도가 베를린이었으며,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이 통일되고 독일제국이 출범한 것이 오늘날 독일로 연결됩니다. 즉, 우리가 독일이라고 부르는 국가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오스트리아의 국왕이었고,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비엔나였으며, 원래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가 비엔나였으나 독일제국이 출범할 때 오스트리아는 여기서 빠지고 독립국이 됩니다. 지금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큰 나라 같지만 신성로마제국 시절에는 오스트리아가 가장 힘이 강했고, 그 상징적인 군주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관련된 장소 중 잔다르멘마르크트 광장(Gendarmenmarkt)이 있습니다.

잔다름(Gendarm)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기병대를 뜻합니다. 베를린 한복판에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광장이 있는 이유, 바로 여기가 프랑스인이 많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인데요. 특별히 위그노 교도가 많이 살았습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개신교인입니다. 많은 박해를 받았죠.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에서 탈출한 위그노 교도를 받아준 이가 프로이센의 국왕이었고, 이처럼 프로이센은 인종, 민족, 종교, 언어 등에 무관하게 외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별히 프리드리히 대왕은 잔다르멘마르크트 광장의 프랑스 돔(Französischer Dom)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전까지 위그노의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아름다운 돔을 추가하고 그 맞은편에는 독일 돔(Deutscher Dom)을 만들어 프랑스와 독일의 종교가 한 광장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이렇듯 프로이센은 굉장히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국가였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군사력과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켜 순식간에 유럽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과 관련된 장소는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광장 중앙에 도너 분수(Donnerbrunnen)가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이 분수를 보고는 당장 철거하고 없애버리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유인즉슨, 여신상이 너무 헐벗고 있어서 풍기문란이라는 겁니다. 명을 받은 신하가 "간 크게" 여왕의 명을 어기고는 몰래 숨겨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설치하였다고 합니다만, 아무튼 별 것 아닌 분수의 장식 하나까지도 정숙한 규율과 질서를 중요시했던 매우 보수적인 분위기를 증명합니다.


오스트리아를 이끈 합스부르크 왕가는 철저히 가톨릭을 수호하며 왕권을 중요시하는 고전적 질서에 집착했습니다. 물론 오스트리아 역시 과학과 학문을 적극 융성했지만 그보다 더 발달한 것은 예술이었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 세계적인 음악가가 모두 비엔나에서 활동한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요.

노이어 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 즉 황실 묘지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이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묘입니다. 죽어서도 권력을 과시할 정도로 오스트리아는 그 왕권을 뼈대로 하는 질서를 유지하는 게 우선시되었습니다.


하필 프리드리히 대왕과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재임 시기가 겹칩니다. 같은 시기 두 국왕이 보여준 국가의 지향성은 정반대였습니다. 재임 시기 중 오스트리아 상속전쟁과 7년 전쟁 등 두 나라가 직접적으로 부딪힌 전쟁도 수차례 있습니다. 결국 승자는 프로이센입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이제 중앙유럽에 경쟁자가 없는 최강자가 되었고, 그 힘으로 프랑스도 누르고(보불전쟁) 독일제국이 출범하게 되죠.


지극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잔다르멘마르크트 광장과 노이어 마르크트 광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갈라놓게 된 흥미로운 단서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