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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362. 백수 선생에 이끌려 윌첸 여행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 겸 화가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는 동글동글 알록달록한 자신만의 건축 스타일로 강한 존재감을 남긴 현대건축가이며, 그의 자연주의적 건축 철학을 일컬어 흔히 "오스트리아의 가우디"라는 수식어로 불립니다.

오스트리아 빈(Wien)에 있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가 그의 건축철학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1985년 완공된 그의 초기작이며, 이후 약 20년간 오스트리아와 독일 위주로 왕성한 건축물을 남기게 됩니다. 곡선과 원색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창문 크기도 다 제각각일만큼 획일적인 것을 혐오하는 그의 스타일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강해집니다.

그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새 건물을 설계하던 중 2000년 별세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남긴 설계대로 완공된 것이 2005년, 또한 그가 설계를 미처 끝내지 못한 프로젝트는 오랜 동료에 의해 마무리되어 완공된 것이 2010년입니다. 즉, 1985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약 20년간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은 그가 지은 예명인데요. 본명은 성이 슈토바서였는데, 슈토가 러시아어로 숫자 100과 발음이 똑같다는 것에 착안하여 숫자 100을 의미하는 독일어 훈데르트를 붙여 훈데르트바서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바서는 '물'을 뜻합니다. 훈데르트바서는 "100개의 강"이라는 뜻이기에 저는 편의상 백수(百水) 선생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워낙 스타일이 특이해 멀리서 봐도 "저거 백수 선생 스타일인데?" 싶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이 맞다고 합니다. 이런 훈데르트바서의 건축 세계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한 글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작가가 되기 한참 전, 그냥 혼자 좋아서 독일 전국을 여행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중간에 환승역에서 몇십분 기다려야 했습니다. 처음 듣는 동네의 작은 기차역에 내렸는데, 이게 딱 봐도 백수 선생 스타일이더란 말입니다.

여기는 윌첸(Uelzen)입니다. 당연히 어떤 책에도, 블로그에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시골 마을이지만 오로지 기차역 때문에 그 이름을 기억에 담아두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진짜 훈데르트바서가 만든(정확히 말하면 개조한) 기차역이 맞았습니다. 곡선을 사랑하는 그가 직선이 난무하는 기차역을 맡았다는 게 흥미로웠고, 여기는 꼭 다시 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차를 갈아탔습니다.


나중에 윌첸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기차역만 보기는 아깝잖아요.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시내로 나갔습니다. 다행히 기차역 내에 훈데르트바서의 디자인북이나 아이템을 파는 기념품숍에서 시내 지도를 비치해두고 있었습니다.

윌첸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약 10여분 걸어야 합니다. 가는 내내 이렇게 그림이 그려진 돌덩이(!)들이 놓여 있습니다. 윌첸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기차역도 훈데르트바서라는 거장에게 위탁하더니, 시내에는 이렇게 공공미술이 가득한 걸 보니 윌첸이 아무 것도 없는 도시는 아니겠구나 하는 신뢰감이 생기더군요. 여전히 아무런 정보 없이 손에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있지만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윌첸 구시가지 도착. 중세풍의 건물 하나하나는 소박하고 아담하지만 그것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그 독일 특유의 소도시의 매력이 잘 살아있었습니다.

아담한 구시가지를 몇시간 걸으며 골목 구석구석 구경했습니다. 하프팀버 스타일의 반목조 건물들이 예쁜 건 물론이고, 가로등이나 조형물, 분수 등 전체적인 꾸밈이 매우 정감 있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어보였던 이 조형물. 알고보니 사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도시의 이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내려오는 울렌쾨퍼(Ulenköper) 전설을 표현한 것입니다. "올빼미 구매자"를 뜻하는 오일렌코이퍼(Eulenkäufer)에서 변형된 단어인데, 농부가 꾀를 내어 올빼미를 비싸게 팔아먹은 스토리입니다. 울렌쾨퍼에서 윌첸이라는 도시명이 파생되었다고 하네요.


동상의 두 사나이는 언어유희로 올빼미를 비싸게 파는 농부, 꾀에 속아 비싼 값을 지불하는 상인입니다. 이 중 상인이 들고 있는 동전을 만지면 재물이 따른다는 미신이 있어 동전만 반질반질합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로지 백수 선생의 기차역에 홀리듯 이끌려 만나게 된 윌첸 여행. 지금은 여행이 아니라 취재를 다니는 입장이라 앞으로도 이렇게 아무 정보 없이 무작정 "필"에 꽂혀 여행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윌첸은 순수하게 여행 그 자체를 즐기며 독일의 숨겨진 매력을 찾던 그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곳이어서 애착이 갑니다. 이 이야기는 <유피디의 독일의 발견>의 49가지 이야기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누구의 결정인지는 몰라도 기차역의 개조를 훈데르트바서에게 맡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윌첸은 함부르크와 하노버를 잇는 중간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두 도시를 오가는 도중 윌첸에서 기차를 갈아타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이 시골 마을에 관심을 갖게 만드니까요.

기차역은 필연적으로 직선 위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틀 내에서 최대한 곡선을 활용해 색다른 느낌을 주고, 다양한 색상으로 포인트를 주는 백수 선생의 센스는 대단합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