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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09. 100년 전 바이마르

독일의 소도시 바이마르(Weimar)는 가보지 않았어도 그 이름을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또는 바이마르 헌법. 여기에 등장하는 바이마르가 맞습니다.

바이마르 헌법은 "민주 헌법의 바이블"로 통하며, 오늘날 많은 나라의 헌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헌법도 포함됩니다.


바이마르 헌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동등한 권리를 보장 받습니다. 성별, 국적, 신분에 따른 일체의 차별을 금지합니다.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고, 모든 국민이 교육받을 권리를 얻었으며,모든 노동자는 권리를 추구할 노동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헌법에서 당연하게 통용되는 많은 이념의 출발점이 바로 바이마르 헌법입니다.


바이마르 헌법을 채택하여 새롭게 출범된 국가가 바이마르 공화국(정식 명칭은 독일국)입니다. 이때 헌법을 채택하는 의회가 소집된 곳이 바이마르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바이마르를 수도로 하는 국가는 아닙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도 베를린입니다.그러나 당시 베를린이 정상적으로 의회를 소집할 여건이 아니어서 다른 장소를 물색하다가 바이마르가 낙점되었습니다.


독일의 그 많은 도시 중 자그마한 바이마르가 낙점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근현대 독일의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한 이념이 꽃피운 도시가 바이마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한  해가 1919년.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입니다.

바이마르의 국립극장 앞에 두 사람의 동상이 있습니다. 독일의 소설가 괴테, 그리고 극작가 쉴러입니다. 괴테와 쉴러는 동시대에 바이마르에 살면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문인이자 고전주의 이념을 통치철학에 녹아들게 만든 사상가였습니다.


이들을 통해 바이마르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운 고전주의는 독일의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민주적인 헌법을 만들어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것의 출발점이 바로 괴테의 시대와 완성된 바이마르 고전주의입니다.

각각 괴테와 쉴러가 살던 집입니다. 오늘날 괴테 박물관과 쉴러 박물관으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아담한 건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 가족이 살기에는 충분히 쾌적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거주지를 제공받고, 기타 많은 편의를 받으며, 당대 최고 지식인이 바이마르라는 소도시에서 마음껏 사상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특히 괴테는 매우 귀하신 몸이었기에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상쾌한 공원에 풍경 좋은 곳에 작업실까지 만들어주었습니다. 괴테의 가든하우스라고 불립니다. 당초 잠깐 머물다 올 마음으로 소도시 바이마르의 초청에 응했던 괴테는 말년까지 계속 바이마르에 거주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팍팍 밀어주었을까요?


당시 바이마르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의 수도였습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큰 나라는 아니었어요. 작센이 무너진 뒤 여러 나라로 분할되었는데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공국의 권력을 쥔 섭정비 안나 아말리아는, 비록 작은 나라일지라도 예술과 학문을 융성하고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독일 각지의 유명인을 초청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였으며, 그 결과 바이마르는 단기간에 크게 발전합니다.

안나 아말리아 섭정비가 살았던 시립궁전입니다. 규모는 크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권력자의 거처를 화려하게 꾸미느라 사치하지 않고, 힘을 과시할 무언가를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 궁전보다 더 화려하게 꾸민 곳은 도서관이었습니다. 섭정비의 이름을 따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이라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독일의 역사적인 학문의 장으로 꼽히는 것은 물론입니다. 괴테가 바이마르에서 머물 때 도서관의 관장을 맡아 더욱 규모를 키우고 다방면의 귀중한 도서를 모았다고 합니다.


바이마르에 터를 내리고 오랫동안 활동하며 인류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인은 괴테와 쉴러 말고도 많습니다.

각각 니체 박물관과 리스트 박물관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가 동시대에 바이마르에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겸 교수 요한 헤르더 역시 바이마르에서 활동하였고, 그가 시무한 교회는 이름까지 헤르더 교회로 바꾸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학, 철학, 신학,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학문을 꽃피웠고, 이것이 독일 전국으로 퍼져나가 독일의 사상적 토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그 토양에서 사상의 씨앗이 자라 결실을 맺은 것이 바로 바이마르 공화국, 그리고 바이마르 헌법인 셈입니다.

100년 전에 맺은 결실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건축과 디자인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버린 바우하우스입니다. 1919년 바우하우스가 처음 시작된 곳이 바이마르입니다.

바우하우스는 건축학교로 설립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바이마르에는 바우하우스 대학교가 존재합니다. 엄밀히 말하여 바우하우스 설립자의 학교가 계승되는 것은 아니지만,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하는 건축 디자인 학교로 바이마르에서 열심히 육성하는 중입니다.


올해는 바우하우스 100주년이기도 하죠. 그래서 독일관광청에서는 올해의 독일여행 테마로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선정해 많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은 연초에 별도의 글로 소개해드린바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지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헌법의 뿌리가 100년 전에 탄생한 곳, 바이마르. 그 헌법이 완성되기까지의 사상적 토양을 제공한 바이마르 고전주의는 독일을 '제대로' 여행하려면 반드시 눈으로 보고 느껴보아야 할 여행 테마임이 분명합니다.


참고로, 여기 소개된 모든 장소는 바이마르 고전주의 지역, 바우하우스 유적, 두 가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자, 다시 국립극장 앞 괴테와 쉴러 동상을 바라봅시다. 얼핏 보기엔 역사 속 위인이 여기 살았다고 기념하는 흔한 동상처럼 보이지만, 이 동상은 곧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함축하여 상징하는 기념물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의 정신을 상징하는 기념물이기도 합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