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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449. 아비뇽 유수부터 종교개혁까지

모처럼 재미없는(?) 역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다들 아시듯이 교황청은 로마(바티칸)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황이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를 떠나, 옆나라 프랑스에서 수십년 간 머물렀던 시절이 있습니다. 14세기 초부터 교황은 프랑스 왕실과의 파워게임에서 완전히 패배하였습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아예 교황청을 프랑스에 만들고 교황이 프랑스에 지내도록 합니다.

프랑스에 새로 생긴 교황청은 아비뇽(Avignon)에 있었습니다. 교황이 아비뇽으로 잡혀갔다고 하여 "아비뇽 유수"라고 부릅니다. 약 70년간 새로 선출된 7명의 교황이 쭉 아비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70년 사이, 교황이 떠난 이탈리아는 엄청난 일을 겪게 됩니다. 흑사병이 창궐했어요. 사람이 무수히 죽어나가는데 아무리 신에게 기도해도 낫지를 않고 심지어 성직자도 같이 죽어나갑니다. 신을 못 믿게 되죠. 전염병 앞에 빈부격차가 없습니다. 부자도 가족과 함께 죽어요. 그러면 그 막대한 재산은 친척에게 상속되겠죠. 굴리는 밑천이 많을수록 벌어들이는 돈은 몇 제곱으로 많은 법. 상상을 초월하는 부유한 자산가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바뀝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고 부자의 스케일은 커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니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만 가득했겠죠. 더 이상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며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기술과 과학에 골몰하기 시작하고, 분위기 전환을 위한 예술의 융성에 힘씁니다.


게다가 한때 세계를 호령했으나 이제 교황도 빼앗기고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된 이탈리아인은 영광스러운 과거에서 답을 찾으려 합니다. 그들이 세계를 주물렀던 로마제국 시대의 철학과 정신으로 돌아갑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모토 하에 그들은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완성합니다. 막대한 부를 가진 자본가가 그 밑천을 대었습니다. 이게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입니다. 피렌체(Firenze)가 르네상스의 수도라 불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최고 부자인 메디치 가문의 도시였으니까요.


르네상스로 반전의 틀을 만든 이탈리아는 교황의 복귀를 강력히 추진합니다. 그리고 이루어냅니다.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거하였고, 이후 새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으나 프랑스에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로 선출해 아비뇽에 두었습니다. 두 명의 교황, 두 나라의 교황청, 유럽은 극심한 분열 속에 빠져듭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는다는 위기감이 통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주교, 추기경, 각계 지도층 등 수많은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해법을 찾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쯤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 속하는 콘스탄츠(Konstanz)가 그 장소입니다. 두 교황이 서로 내가 옳다고 주장하니 쉽게 결론이 안 나겠죠. 콘스탄츠 공의회는 무려 4년간 계속됩니다. 그리고 두 교황을 모두 파면하고 새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였으며, 이제 교황청은 다시 로마에 두는 것으로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로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교황도 공의회에 복종해야 하는 룰이 생겼거든요. 남의 힘으로 내 자리를 지키면 그들보다 밑이 되는 건 당연지사. 새 교황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권위를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마침 이탈리아에 불고 있는 르네상스 열풍에 힘입어 교황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을 명령합니다.


아시듯이 성 베드로 대성당은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의 수석(?) 제자이며 후대에 의해 초대 교황이라 일컬어지는 베드로의 묘 위에 거대한 성전을 지으면 일종의 "성지"가 되니까 다시금 교황청의 권위를 세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죠.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대공사였지만, 그뿐 아니라 아예 로마의 중심부를 싹 다 뜯어고치는 도시계발 프로젝트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르네상스 열풍으로 이 프로젝트를 뒷받침할 기술력은 확보되어 있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등 천재적인 일꾼도 구해두었어요.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르네상스를 주도한 부자 상인들이 굳이 교황을 위해 전재산을 털 이유는 없잖아요.


그러면 신도들의 기부금(헌금)으로 충당해야 하는데, 이미 이탈리아의 백성들은 흑사병으로 인해 신앙심이 쇠퇴한 상태라 주머니를 열지 않습니다. 공사자금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교황은 머리를 굴렸죠.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고 유럽 전체 인구의 절반이 소멸된 사건입니다만, 어쨌든 그 공포가 가장 컸던 곳은 이탈리아입니다. 상대적으로 알프스 이북은 공포심이 덜했어요. 아직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야 했어요. 알프스 이북의 신성로마제국이 교황의 자금줄이 되어야 했습니다.

교황은 마인츠(Mainz) 대주교와 작당하여 쉽게 돈을 쓸어모을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면죄부(면벌부)를 돈을 받고 파는 겁니다. 기존에는 십자군전쟁 참전자 등 뭔가 큰 공을 세우거나 희생을 치른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면, 이제 아무나 돈만 내면 면죄부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연옥에서 평생의 죗값을 한 번 치르고 그 후에 천국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면죄부가 있으면 이 연옥을 건너뛰고 바로 천국으로 갑니다. 마인츠 대주교가 고용한 설교사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교하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도 메디치 가문 못지않은 거상이 있었어요. 푸거 가문입니다. 그들은 제국 전역에 사무소가 있었기에 여기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판매 대금의 절반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자금이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마인츠 대주교와 푸거 가문이 가졌습니다.

그 시기, 교황권이 타락한 이래 가톨릭은 매우 부패한 상태였습니다. 성직을 돈 받고 팔았어요. 마인츠 대주교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딱 셋뿐인 대주교 중 한 자리이면서 대관권(황제가 선출되면 관을 씌워주는 사람)을 가져 실질적인 최강자의 지위였습니다. 이런 자리를 돈 주고 사려면 한두푼으로 어림도 없었겠죠. 당시 마인츠 대주교인 알브레히트는 일단 나이가 자격조건에 미달되어 대주교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막대한 돈을 주고 그 자리를 샀습니다.


그 돈은 푸거에게 빌렸어요. 그러니 마인츠 대주교는 돈을 갚아야 했고, 푸거는 돈을 받아내야 했고, 교황은 공사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삼박자가 딱 맞아 면죄부 판매에 엄청나게 열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부패한 종교계에 반발하여 참회와 시정을 요구하는 종교지도자는 기존에도 몇 있었습니다. 프라하(Praha)의 얀 후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죠. 하지만 얀 후스는 앞서 소개한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다가 그 자리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합니다. 그걸 보고 났으니 면죄부 판매라는 사악한 행위를 보며 불만을 가진 사람은 많았어도 함부로 반대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에서 일하는 어떤 성직자 한 명이 눈치없이(?) 손을 들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는 정말 아닌 것 같아. 내가 성경을 읽어보니 이게 아니더라고. 교황이나 대주교가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닐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우리 누가 맞는지 토론 좀 해보자."


그 성직자가 마르틴 루터입니다. 루터는 95개 문항의 발제문을 내걸었습니다. "교황 꺼져"가 아니라 "우리 얘기 좀 하자"는 소심한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불만을 속으로 억누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 극히 공감하며 전국에 퍼트립니다. 루터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교황과 맞서 싸우는(=성서를 지키는) 종교개혁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도 "친 교황파"가 있겠죠. 특히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교류가 많은 바이에른이 그랬습니다. 바이에른은 반종교개혁의 선봉에 섰습니다. 당시 바이에른 대공은 뮌헨(München)에 새 교회를 만들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정신이며,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되돌린 사상적 뿌리입니다. 뮌헨의 성 미하엘 교회는 알프스 이북의 가장 거대한 르네상스 교회 건축물로 꼽히며, 특히 이 교회를 만들다가 지붕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이를 불길하게 여긴 대공의 명령으로 더 큰(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큰) 교회로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이탈리아와 달리 르네상스 양식이 유행하지 못했습니다. 르네상스가 유행해야 할 그 시기에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갔고 그 후에는 30년 전쟁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죠. 독일의 사실상 유일한 르네상스 교회 건축물이 뮌헨의 성 미하엘 교회입니다. 건축 양식 하나에도 반종교개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담겨있는 셈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도시만 해도 4개국 8개 도시입니다(바티칸을 따로 구분하면 5개국이 됩니다). 모두 관광지로 유명한 곳들이죠. 그냥 여행할 때에는 실감이 덜하지만, 이렇게 퍼즐을 맞춰놓고 들여다보면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보이는 다른 나라 도시들간에 하나의 테마가 완성됩니다.


역사는 재미없고 어렵고 복잡한 영역으로 생각되지만,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역사의 큰 틀만 알아도 여행의 재미를 더 높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역사와 전통을 베이스로 깔고 있는 유럽여행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여행하는 이유(EU)" 포스트에 함께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