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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 Travel to Germany

두.유.Travel to Germany :: #063. 알베르트 슈페어

독일은 1천년을 상회하는 긴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남겼죠. 수많은 천재적인 건축가들도 등장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시대에 다른 사조로 활동했던 이 수많은 건축가 중 가장 비범한 천재성을 드러낸 사람은,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입니다.


그러나 슈페어는 천재적이었을지 몰라도 박수받고 기념 받을 사람은 아닙니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아 나치 독일의 무수한 건축물을 도맡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유와 인권을 박탈당하고 죽어야 했습니다. 인종차별 등 나치가 자행한 범죄에 대해서도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광기마저 충족시킬 정도의 어마어마한 결과물을 여럿 완성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의 대표작은 히틀러가 집무를 보았던 총통관저(국가수상부; Reichskanzlei)입니다.

이건 궁전이라 하기에도 적절치 않고, 아예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신전처럼 만들고 그 안에 히틀러가 있으면 결국 히틀러가 신이라는 소리죠. 이렇게 히틀러의 광기에 날개를 달아주는데 히틀러가 총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워낙 나쁜 쪽으로 상징적인 건물이기에 전후 베를린에 진주한 소련군은 총통관저를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잔해를 가지고 트렙토 공원에 위와 같은 소비에트 기념비를 만들었어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긴개긴 지금 우리는 총통관저를 몇 장의 흑백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저런 대리석이 무수히 쏟아졌다는 뜻이니까 그 내부가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습니다.


슈페어가 만든, 히틀러를 신처럼 우상화하는 장소는 뉘른베르크에도 있습니다.

현재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대 페르가몬 신전을 본떠 뉘른베르크에 체펠린 연단을 만들었습니다. 사진으로 보기에도 비슷하죠. 신전과 같은 연단을 만들고 히틀러가 중앙에 서면, 그 아래에는 나치 전당대회를 끝낸 당원과 군중이 사열하며 히틀러를 찬양하는 겁니다. 슈페어는 이런 걸 만들고 하늘로 강한 조명을 쏘아 우상화의 끝을 완성합니다. 그걸 리히트돔(Lichtdom), 즉 "빛의 대성당"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대놓고 대성당이래요. 그러면 히틀러가 하나님이죠.

체펠린 연단도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에 의해 폭파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폐허만 남아있으며, 곳곳에 자료사진과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표지판을 세워 히틀러의 광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단, 뉘른베르크에서 이 장소를 더 이상 관리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많이 깨지고 훼손되었기에 방문자는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챙기라는 경고문구가 붙어있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에는 파괴되어 그 광기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지만, 슈페어가 만든 건축물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도 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주경기장, 올림픽 스타디움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은 히틀러가 집권한 뒤 독일이 다시 부활했노라 세계에 자랑하려고 엄청나게 공을 들인 행사였죠. 그 메인 스타디움이니 얼마나 공을 들였겠습니까. 슈페어는 당대 최고의 기술력으로 이 거대한 경기장을 완성했고, 어찌나 튼튼한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경기장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내부의 그라운드나 객석 등 편의시설은 현대에 들어 개보수한 것이지만 경기장의 골격은 슈페어가 만든 그것입니다. 오늘날 분데스리가 축구팀 헤르타 베를린의 홈구장입니다.


슈페어는 뉘른베르크에도 거대한 경기장을 하나 만들려고 했어요. 무려 40만명 수용 규모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초석을 놓았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공사는 무산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이런 국력을 과시할 프로젝트의 진행은 어려웠죠. 게다가 전쟁물자를 조달해야 하니 건설은 다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슈페어는 전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합니다. 가령, 연합군의 폭격이 심해진 뒤 군수공장이 파괴되니까 공장을 지하에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았어요. 프로젝트명이 바인구트 아인스(Weingut 1; 포도밭 1호라는 뜻). 

폭격에 견딜 수 있는 아치형 지붕과 그 내부에서 공장을 돌릴 수 있는 실용성이 핵심이었습니다. "포도밭 1호"에서 만든 부품을 "포도밭 2호"로 보내 조립하는 등 종합적인 체계를 다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만들려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포로를 가혹하게 부려 수천명이 사망한 야만적인 현장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슈페어의 일생일대의 프로젝트,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게르마니아입니다.

히틀러는 당연히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영국, 프랑스, 소련을 다 먹는 거죠.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우방이었고, 결국 온 유럽이 다 자기 것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그 대제국에 걸맞는 수도가 있어야겠죠. 베를린을 싹 개조해서 수도의 품격에 걸맞는 모습을 갖추고자 했습니다. 1941년 계획이 완성된 이 프로젝트를 맡은 이는 당연히 슈페어였구요.


당시에는 베를린 개조 정도로만 알려졌으나 훗날 슈페어의 회고록에서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세계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였음이 밝혀집니다. 게르만족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당찬 포부이자 미친 광기였습니다.

오늘날 브란덴부르크 문과 전승기념탑 사이에 이런 넓은 길이 직선으로 뚫려 있습니다. 6월 17일 거리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게르마니아 프로젝트의 동서 방향의 뼈대입니다. 당초 히틀러의 계획은 지하에 자동차 도로를 만들고 지상은 보행자 거리로 조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대규모 열병식을 할 수 있으니까요.


동서로 연결하는 길은 기존의 브란덴부르크 문, 올림픽을 위해 지은 거대한 올림픽 스타디움 등이 연결됩니다. 남북으로 연결하는 길의 양끝에는 인민회관(Volshalle)과 개선문이 들어설 계획이었습니다.

인민 회관의 상상도입니다. 히틀러가 자기 아이디어를 스케치해서 슈페어에게 주었고, 슈페어가 그것을 구체화하여 설계했습니다. 바티칸 대성당을 능가하는 돔 사이즈였습니다. 히틀러는 게르만 대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마치 판테온 신전처럼, 바티칸 대성당처럼 말입니다. 그 꿈이 여기에 반영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고대의 신전을 직접적으로 모방한 체펠린 연단뿐 아니라 총통관저, 올림픽 스타디움, 인민회관 등이 모두 고전주의 양식에 근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히틀러는 아주 먼 훗날 이 건물들이 무너지고 파괴되어도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처럼 남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고전주의가 답이죠. 무너져도 기둥이나 필로티 등이 멋있게 남을 테니까요. 광기의 스케일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게르마니아 프로젝트는 결국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물론 전쟁이 불리해지고 물자가 부족해진 탓도 있구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슈페어가 막상 건축을 시작해보니 베를린의 습지 지형이 이 정도 사이즈의 건물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만들 능력은 있으나 베를린은 그 터로 부적절했던 거죠.


만약 여건만 되었다면 슈페어는 이것을 만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분명 독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재능을 가진 건축가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재능을 나쁜 곳에 써먹었으니 합리화는 안 되겠지만요.

히틀러의 원대한 꿈이라 쓰고 망상이라 읽는다 게르마니아 프로젝트는 베를린 지하세계라는 이름의 박물관에 별도의 전시장이 있어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슈페어는 다른 전범과 함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됩니다. 전범재판에서 모두가 남탓을 하거나(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떳떳했는데, 딱 두 명만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했는데 슈페어가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슈페어는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만기출소합니다. 이후 자신이 보고 들었던 나치 지도부의 실상을 솔직히 다 털어놓아서 베일에 가려진 나치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 회고록과 다른 저서를 출간해 자신의 과오를 다시 한 번 자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였고, 인세는 전액 유대인 피해자 단체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기부하면 논란이 될 것을 우려해 가명으로 기부했다네요.



얼마 전 독일의 가장 높은 빌딩 Top 10을 소개했었는데요. 완공되면 모든 기록을 갈아치울 밀레니엄 타워가 막바지 공사중이라고 했었습니다. 바로 이 밀레니엄 타워의 건축가가 알베르트 슈페어 주니어, 슈페어의 아들이더라구요.


아들이 건축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버지가 복역중일 때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독일 내에서 활동하기엔 부적절했는지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다가 부친이 사망한 뒤 1984년부터 프랑크푸르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건축사무소를 내고 실력을 인정받아 큰 프로젝트도 여럿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201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밀레니엄 타워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아무튼 그의 유작이 독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될 예정입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건축에 있어 남다른 유전자를 가졌던 게 분명합니다.